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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만의 한방이야기>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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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만의 한방이야기>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 박재만 객원칼럼리스트 csnews@csnews.co.kr
  • 승인 2006.12.26 0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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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에서 만나는 직업병 환자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노동자, 특히 직업병과 관련된 단체, 환자들에게는 나름대로 각별한 의미가 있는 의료기관입니다.

    88서울올림픽 폭죽이 한창이던 1988년,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에 위치한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근무하던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증이라는 직업병 판정을 받은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58년 인조견을 생산하는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채 파악도 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혈압, 난청, 눈 망막질환, 말초신경질환 등으로 직업병인 줄도 모르고 사망하거나 고통받아왔었습니다.

    직장동료들이 비슷한 증상으로 쓰러져가자 알고 보니 이황화탄소 중독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기나긴 싸움을 통해 직업병 판정까지 이끌어 내게 되었습니다. 1993년 원진레이온 회사가 폐업하면서 산업은행으로부터 공장부지 매각대금 일부를 받아내 원진직업병 전문치료기관을 만든 것이 지금의 구리시에 위치한 원진녹색병원입니다.

    지금은 구리시와 별도로 서울 면목동에 녹색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울 녹색병원 입구에는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라는 병원 설립취지를 담은 푯말이 걸려 있습니다.

    진폐증 환자 한 분을 호흡기 내과로부터 협진의뢰를 받아 제가 한방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20년이 넘도록 강원도 태백, 영월 일대 탄광에서 탄을 캔 탄광 노동자였습니다. 20년전 진폐증 판정을 받아 치료를 해오던 중 작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현재는 의식이 불분명하고 천식, 가래 등으로 1년 넘게 병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4시간 병간호는 아내의 몫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가뿐 숨소리에 검은색 가래가 호스로 배출되었다고 하니 탄광 노동을 그만둔 지 20년이 지나도록 탄가루가 아직까지 몸에서 다 나오지 않았나 봅니다. 이런 정도의 진폐증 환자에게 폐가 제 기능을 하길 바라는 건 불가능합니다.

    사실 어떤 질환이 직업병으로 판정될 정도가 되면 정상으로의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수년간 작업환경에서 누적된 질병이기 때문에 회복의 개념 보다는 더 이상의 악화를 막는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병은 발견하기 전에 작업현장에서의 사전예방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 환자에게 침시술을 할 때는 태평양에 돌맹이 하나 던지는 기분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던진 돌맹이가 만든 물결이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에 가닿기나 할까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병간호를 하는 아내는 그 분의 몸상태가 어제와 달라진 것이 있으면 제게 잊어버리지 않고 꼬박꼬박 알려줍니다.

    직업병을 가지고 내원하는 환자들 모두가 회복 불가능한 중증 환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직업병이 중증이냐 가벼운 질환이냐가 관건이 아니라 작업환경에 의한 요인이 결정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업병은 작업환경에서 어떤 특정 요인이 반복적으로 누적되어 특정 장기나 신체 부위에 구조적인 변형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심지어 정신적 장애까지 유발하기도 합니다.

    직업병을 발견하는 시스템을 잘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의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게 할 것이고 해당되는 사람에게는 질병의 악화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업병에 대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대처법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가벼운 증상을 제때 치유함으로써 더 이상의 악화를 막아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려냅니다. 반면 직업병은 한 사람의 고통을 제때 발견하여 적절한 대처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대량 고통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당신의 고된 탄광 노동이 누군가의 추운 겨울날 따뜻한 연탄이 되었을텐데 그분의 노년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종일 옆에서 병간호하느라 환자를 비울 수 없어 1년에 딱 한번 춘천집에 다녀오셨다는 아내에게, 남편과 행복했던 기억이 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저 일만 하느라 우리는 행복을 느낄 시간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내는 남편의 고된 노동이 너무 안스러워 내가 해줄 것은 별로 없지만 평생 옆에 있어주겠다는 묵은 약속을 지키며 병간호를 한다고 하더군요.

    격일로 병실을 찾아가서 진료할 때마다 의료인인 저는 사회와 질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설사 태평양 돌맹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더 힘차게 던지게 됩니다.

    녹색병원 입구에 내걸린 푯말처럼
    사회는 지금도 고민해야 합니다.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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