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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칼럼] 금융시장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질 때까지

최현숙 컨슈머리서치 대표 csnews@csnews.co.kr 2017년 09월 14일 목요일 +더보기
일전 거래하던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내 통장에 몇 개월동안 움직이지 않는 돈이 있는데 입출금 통장은 이자가 거의 없으니 ELS로 갈아타는게 좋지 않겠냐는 권유였다. 특별히 급하게 쓸 돈이 아니어서 이자라도 챙겨보려 은행을 방문했다.

이러저러 설명을 듣고 가입에 동의하니 계약서를 내민다. 계약서도 간단했다. 그저 은행원이 지정해주는 곳에 이름 서명하는 것과 두어군데 희미하게 새겨진 ‘설명 들었음’ 위에 자필로 그대로 필사하는 것 뿐이었다.

계약서를 건네주고 은행을 나오면서 뒷맛이 좀 개운치 않다. ELS는 투자 리스크가 적지 않은 상품이다. 수익은커녕 원금이 손실될 수도 있다. 만기가 되기 전까지 현금화도 어렵다. 물론 그 점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수익에 대해선 그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설명한다. 물론 시간도 수익 설명에 훨씬 더 할애한다.

매력적인 수익률 설명을 한참 듣고 난 뒤 이어지는 짧은 리스크 설명은 그냥 사소하고 발생 확률이 거의 없는 군더더기처럼 들린다. 마치 홈쇼핑에서 잘 알려진 연예인이 나와 싼 보험료와 높은 보장에 대해 구구절절히 설명한 뒤 ‘5년 갱신후 오를 수 있습니다’, ‘기왕력이 있으면 보험이 거절될 수 있다’는 등의 불리한 조항은 빠른 기계음으로 처리하는 것과 같은 효과다.

최악의 경우 설명하는 사람이 리스크에대한 설명을 거의 안하고 수익률만 부풀려 얘기했다해도 그 모든 모호한 내용들이 ‘설명 들었음’ 5자로 뭉뚱그려진다. 어떻게 설명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 나중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내가 자필로 적은 ‘설명들었음’이 족쇄가 될 것이 뻔 한 노릇이다.

# 보험에 가입하고 나면 해피콜이 온다. 상담원은 정말 속사포처럼 말대포를 쏘아댄다. 그렇다고 짧은 문장도 아니고 쉬운 언어도 아니다. 민사 소송에서나 나올법한 올드한 법적 용어들로 가득한 긴 문장을 기계처럼 숨도 안쉬고 읽어대며 예, 아니오를 강요한다.

중간에 어디 말을 끊고 들어갈 틈도 없다. 처음엔 내용을 좀 제대로 듣고 이해하려하지만 금방 인내심이 바닥난다. 10여분이 넘어가면 ‘예 다 알았으니까 빨리 좀 끝내주세요’ 호소할 지경이다.

이렇게 끝낸 해피콜은 결국 문제가 생길 경우 내 족쇄가 된다. ‘당시 녹취록에 고객님이 네 하신 걸로 확인되십니다’라며 나를 몰아칠 것이다.

최근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과 금융소비자네트워크가 ‘금융상품 불완전 판매와 소비자 보호방안’을 주제로 공동 개최한 소비자 금융포럼에 다녀왔다. 바로 내가 겪었던 개운치 않은 문제들이 심도있게 다뤄졌다.

토론자로 참여한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상임 대표는 이를 ‘알리바이’라고 격하게 표현했다. 당초 이같은 자필서명과 해피콜같은 제도들이 금융사들의 불완전 판매를 줄이려는 차원에서 도입됐지만 본말이 전도돼 이제는 금융사들의 ‘알리바이’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금융 소비자 관련 문제는 기본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인한다. 모든 정보를 독점한 거대 금융사와 정보를 얻을 곳이라곤 그 금융사밖에 없는 소비자와의 근원적 불평등이 낳고 있는 문제들이다.

다행히 새로 임명된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은 “금융감독의 궁극적 목적은 소비자보호”라며 “금감원을 소비자 중심조직으로 탈바꿈 시키겠다”는 뜻깊은 취임 일성을 날렸다. 모처럼 우군을 만난 기분이다.

이제는 불완전한 계약에 소비자가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는 ‘평평한 운동장’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최현숙 컨슈머리서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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