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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화학·전자산업 중흥 이끈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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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화학·전자산업 중흥 이끈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 유성용 기자 sy@csnews.co.kr
  • 승인 2019.12.1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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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그는 LG그룹 2대 회장으로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그룹을 이끌었다.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

LG그룹 측은 “장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며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례 일정은 알리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LG그룹은 구 명예회장의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이 지난해 별세했을 때도 소탈하고 겸손하게 살아온 고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 비공개 가족장을 치르겠다고 밝혔었다.

구 명예회장은 1925년생으로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1970년 45세 때부터 LG그룹 2대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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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명예회장

LG그룹에 입사한 것은 1950년. 진주사범을 졸업한 고인은 부산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으나 부친의 부름을 받아 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구인회 창업회장이 별세하면서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회장을 맡았다. 1987년부터 1989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그룹은 럭키와 금성사, 호남정유 등 8개사에 연간 매출이 270억 원이었다.

취임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 때 범한해상화재보험과 국제증권, 부산투자금융, 한국중공업 군포공장, 한국광업제련 등을 인수했고 럭키석유화학(1978년), 금성반도체(1979년), 금성일렉트론(1989년) 등을 설립하며 외형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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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4월, 금성정밀(현 LG이노텍) 광주공장 준공식에서 공장을 둘러보는 구 명예회장

이후 1995년 70세에 ‘21세기를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인재들이 그룹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며 장남 고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줬다.

고인이 경영에서 물러날 당시 LG는 30여개 계열사에 매출액 38조 원의 재계 3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구 명예회장은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회장 재임 기간에 설립한 국내외 연구소만 70여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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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나는 대로 생산현장을 살피고 연구소를 들러 임직원을 격려한 구자경 회장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 지역에 LG전자와 LG화학의 해외공장 건설을 추진해 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그룹에 확립했다.

검정 뿔테안경에 경상도 사투리가 트레이드마크인 구 명예회장은 안정과 내실을 중시하는 경영스타일로 유명했다.

고인이 이끌던 LG는 ‘보수적인 기업’의 대명사로 불렸고, 대기업의 부침이 심했던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특혜나 이권과 관련해 잡음을 일으킨 사례가 거의 없는 편으로 전해진다.

한편 고인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관여해 왔다.

또 충남 천안에 있는 천안연암대학 인근 농장에 머물면서 된장과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의 맛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구 명예회장은 슬하에 지난해 타계한 구본무 LG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 = 유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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