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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사에게 병력 알렸는데 보험금 청구하자 '계약해지' 쇠망치...구멍뚫린 '고지의무'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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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사에게 병력 알렸는데 보험금 청구하자 '계약해지' 쇠망치...구멍뚫린 '고지의무' 규정
  • 문지혜 기자 jhmoon@csnews.co.kr
  • 승인 2020.11.10 0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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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시 유성구에 사는 박 모(남)씨는 지난해 3월 A사 실비보험에 가입했다. 둘째 아이가 몸이 약해 자주 아프자 설계사를 통해 가족 4명에 대한 보험을 한꺼번에 가입한 것이었다. 당시 설계사에게 둘째 아이가 병원신세를 자주 진다고 이야기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하지만 올해 들어 보험금을 청구하려고 하자 ‘고지 의무 위반’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박 씨는 “설계사를 통해 병원에 자주 간다고 이야기를 전했기 때문에 모두 반영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보험금은커녕 계약이 해지된다고 하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없느냐”고 되물었다.

보험 가입 시 자신의 병력을 알려야 하는 ‘고지 의무’를 지키지 않아 보험금 지급이 거절되거나 계약 취소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는 설계사에게는 '고지의무 수령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약 단계에서 제대로 안내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비자고발센터(www.goso.co.kr)에는 보험 계약 당시 설계사와의 상담과정에서 이전 병력 등을 모두 이야기했고 문제가 없다는 설계사의 확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했다는 불만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설계사로부터 "그 정도의 병력을 알리지 않아도 된다"거나 "기간이 지나 문제 없다"는 안내를 받고 가입했다는 내용도 적지 않다.

고지의무는 청약 시 ▶과거 병력 ▶약물복용 ▶입원 등의 사실을 보험사에 알려야 하는 소비자의 의무다. 보험사는 소비자의 정보를 가지고 위험률을 계산해 보험료를 책정하기 때문에 이를 속일 경우 보험 사기로 취급될 수도 있다.
 

실제로 고지의무 위반과 관련 민원건수는 지난 2017년 1만4607건, 2018년 1만5724건, 2019년 2만1431건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고지의무위반으로 인해 보험금이 줄어들거나 지급하지 않는 '부지급건수' 역시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상반기 전체 부지급건수 6065건 가운데 절반이 넘는 3355건이 고지의무위반에 따른 부지급이었다.

특히 계약건수 자체가 많은 삼성생명이 고지의무위반에 따른 부지급건수가 1175건으로 가장 많았고 라이나생명이 577건으로 뒤를 이었다. 생보사 빅3인 교보생명(447건)과 한화생명(363건)도 전체 부지급건수 가운데 고지의무위반 사유가 절반을 넘어섰다. 

이제는 일반 소비자들도 상식처럼 인지하게 된 '고지의무'와 관련해 위반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이유는 설계사가 본인에게 '고지의무 수령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안내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설계사는 보험사와 소비자의 계약을 중개하는 역할을 할 뿐 계약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입자의 병력 등을 보험사에 전달할 의무도, 권한도 없다. 현 규정상으로는 반드시 소비자가 직접 어떤 정보가 계약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판단해 보험사 직원에게 알리고 계약서에 명시해야 한다. 

하지만 소비자는 설계사를 보험사를 대신해 계약을 맺는 대리인으로 여기고 설계사에게 자신의 병력을 알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판단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설계사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고지의무를 누락하는 것이 계약 성사에 도움이 된다는 점도 악용될 여지가 있다. 괜히 소비자의 병력을 보험사에 전달했다가 심사가 거절되거나 일부 병력 부담보 등으로 보험료가 올라갈 경우 수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의적이지 않은 고지의무 위반으로 계약이 해지되는 사례가 늘어나자 일각에서는 설계사에게 ‘고지의무 수령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맹수석 충남대 교수는 “보험설계사 고지수령권을 인정하고 고지의무 수동화를 제도화시켜야 한다”며 “보험설계사 역량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고 보험사의 정보수집 능력 또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보험설계사에게 실질적 권한에 따른 책임을 지우는 게 마땅하다”고 조언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보험설계사의 고지의무 수령과 관련한 문제점 및 개선과제’라는 보고서를 내고 보험계약자 보호차원에서 보험설계사에게 고지의무 수령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창호 공정거래팀 입법조사관은 “법적으로 고지의무 수령권이 없는 보험설계사의 설명의무도 그 효력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선 설계사에게 고지의무 수령권을 부여하고 고지의무 수동화, 보험설계사에 대해 판매자 책임을 부과하는 방안, 보험계약 과정에서 전부 녹취 또는 모바일 청약시스템으로 고지의무를 이행하는 방안, 민법상 표현대리권을 인정하는 고지의무 수령권 인정 등 개선방안에 대해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보험사에서는 설계사 고지의무 수령권보다 고지의무에 대해 '소비자 교육'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소비자가 명확하게 고지하지 않고 보험계약에 대해 확인하는 해피콜에서도 '병력이 없다'고 대답한 뒤 나중에 잘 몰랐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보험사뿐 아니라 소비자도 계약 체결 시 의무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도록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문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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