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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 몰라보게 날씬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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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 몰라보게 날씬해지고 있어요"
  • 헤럴드경제신문 제공 csnews@csnews.co.kr
  • 승인 2008.02.2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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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저녁 햇살이 에펠탑 뒤로 뉘엿뉘엿 사라지던 지난 1월 20일. 루브르박물관 지하에 꾸며진 패션쇼장 런웨이에는 조그마한 동양 여성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우레와 같이 터지는 관객의 박수와 함성 속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목례를 한 후 곧바로 무대 뒤로 사라졌다. 가녀리지만 당당한 뒷모습. 그 뒷모습에는 지난 20년간 ‘간결하지만 무언가 남다른 남성복’을 짓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이의 열정과 의지가 가득했다. 세계 패션계에 묵묵히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가고 있는, 파리에서 이제 막 열두 번째 남성복 컬렉션을 펼친 디자이너 우영미의 뒷모습이었다.

▶“국내 최고인데 뭐하러 사서 고생하냐고요?”= 파리라는 도시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패션스타일을 창조해내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뉴욕과 밀라노가 ‘상업적인 의상’으로 급부상한 건 사실이지만 파리야말로 가장 창의적인 패션도시요, 수많은 크리에이터가 몰려드는 곳이다. 물론 진출만 했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진입자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패션의 본고장인 만큼 실력에 대한 분석과 비평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조금이라고 시원찮으면 퇴장(?) 명령이 가차없이 내려진다. 이를 알면서도 우영미는 파리를 선택했다. 최고가 되려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도전정신 때문이었다. 만약 파리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우영미는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여유롭게 살았을 것이다. 1988년 한국에서 ‘솔리드 옴므(Solid Homme)’를 만들고 나서 우영미는 남성 패션계를 평정하며 승승장구했다. 멋쟁이 전문직 사이에서 가장 입고 싶은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2000년 초 ‘파리컬렉션에 진출하겠다’고 밝혔을 때 큰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는 “점점 높아져가는 국내 패션수준을 감안할 때 우물 안 개구리로는 안 된다”며 밀어붙였다. 단, 서두르지 않았다. 초심으로 돌아가 트렌드를 분석하고, 현지 남성복을 보고 느끼며 치열하게 준비한 끝에 무대에 섰다. 그때가 2002년 여름,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들썩이던 때였다. 첫 파리컬렉션에서 우영미는 ‘정갈한 남성복’이란 평을 받았다.

지금도 우영미는 첫 컬렉션을 잊지 못한다. ‘솔리드 옴므’와 그녀의 ‘뮤즈’였던 강동원과 함께 한 컬렉션이었기 때문. 벽안의 모델 사이에서 어린 모델이었던 강동원은 당당한 워킹을 선보이며 갈채를 끌어냈다. 이후 우영미는 2004년 신사복 업체 ‘던힐’이 선정한 ‘프랑스 패션계와 함께할 신인 남성복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등 자기 색깔이 뚜렷한 남성복 디자이너로 입지를 다져갔다. 그리고는 올봄, 어느덧 열두 번째 컬렉션을 선보이며 파리에서 스타일리시한 남성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뜻밖의 순간에 남성의 멋을 발견하죠”=이번 2008~09 F/W 컬렉션에서 우영미는 ‘Unexpected silhouette’이라는 제목으로 35벌의 스타일리시한 의상을 선보였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변덕스러운 겨울날, 남자들이 후드나 모자를 여밀 때의 모습을 세련된 룩으로 표현한 것. 남성복에 대한 우영미의 지론인 ‘Modern & Classic’은 변함없었으나 ‘심심한 식물성’으로 대변되는 단색조 컬러와 심플한 라인에, 새로운 디테일을 살짝 더해 2008년 남성복 트렌드인 ‘네오 여피룩’을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다. 르피가로와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유수 일간지도 “청결하고 침착하며 세련됐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영미는 “한국 남성도 알고 보면 패션의식이 대단하다. 1~2년 전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날씬해지고 있다. ‘솔리드 옴므’의 사이즈 스펙을 재조정하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여러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입어보고, 내게 맞는 것을 고르려는 노력이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열린 마음이 보태지면 한국 남성, 정말 멋있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20년 됐으니 이제 미국시장 공략해야죠”=국내에서 ‘솔리드 옴므’로 디자이너 남성복 업계 수위를 달리고 있는 우영미는 해외에선 ‘우영미’라는 이름의 시그니처(상위개념) 브랜드로 시장을 공략 중이다.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로는 유일하게 2006년 2월 파리의 최고급 백화점인 봉마르셰에 진출한 것을 비롯해 4월에는 파리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멋쟁이가 모인다는 마레지구에 예술작품처럼 근사한 단독매장을 여는 등 세계 10여개국에 걸쳐 20여개의 매장을 선보이고 있다. 매출도 기대 이상이다.

또 영국의 셀프리지백화점과 이탈리아의 단토네거리 등 전세계 스타일을 주도하고 있는 패션가에서도 그의 패션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제 미국 시장이 남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공략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미국의 네 군데 고급 남성복 멀티숍에 진출해 있는데 니만마커스, 삭스핍스애버뉴 등의 백화점에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

▶“남성의 몸을 남성보다 더 잘 이해하는 디자이너로 남고 싶어요”=‘솔리드 옴므’가 스무살이 되는 동안 솔리드 옴므도 변했고, 우영미도 변했다. 차분히 가라앉은 검정과 잿빛, 흰색의 솔리드(무늬 없는) 소재로, 침착하지만 어딘가 유머와 시크함이 숨어있는 스타일을 고집해온 그는 “모두들 내 옷을 식물성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작지만 신선하게 변화를 추구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변치 않은 게 있다면 여성복을 하라는 제의를 물리치고 있다는 점. “사실 여성복을 왜 안 만드느냐는 유혹이 많다. 내가 입고 있는 흰 셔츠 등을 보고 탐내는(?) 이들도 여럿 있다. 그러나 나는 한 길만 갈 것이다. 무덤덤한 남성복이 좋으니까. 앞으로도 남성복을 누구보다 더 잘 만드는 디자이너로 남겠다”며 목표를 분명히 했다. 그를 가리켜 ‘신중한 개혁주의자’라 부르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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