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김시습의 죽기 직전 글"

2008-07-16     뉴스관리자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 죽기 직전에 남긴 글이 뜻밖에도 국가가 보물로 지정한 전적(典籍) 문화재 안에서 발견됐다.

이를 통해 만년에 서해안을 떠돌던 김시습이 어떻게 부여 만수산(萬壽山) 기슭 무량사(無量寺)로 옮겨 그곳에서 입적하게 되었는지도 해명됐다.

   김시습 마지막 글을 찾아낸 주인공은 한문학 관련 블로그(http://blog.naver.com/mtsmt)를 운영 중인 안영직 씨.

   그는 "최근 전산화되어 인터넷에 공개된 전적문화재들을 조사하던 중에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국가기록유산(http://www.memorykorea.go.kr)에서 지난 2006년 4월28일 보물 제1470-2호로 지정된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 소장 '지장보살상ㆍ시왕상복장전적(地藏菩薩像ㆍ十王像腹藏典籍)'에 포함된 수능엄경(권 6-10) 끝에 붙은 발문(跋文)이 김시습이 작성한 것이며, 더구나 작성 시기가 그가 사망한 1493년 2월임을 확인했다"고 15일 말했다.

   발문에는 '황명(皇明) 홍치(弘治) 6년(1493) 세재계축(歲在癸丑) 중춘(仲春.2월) 췌세옹(贅世翁) 김열경(金悅卿) 근발(謹跋)'로 나온다. 계축년인 명나라 홍치 6년 2월에 췌세옹이라는 호를 쓰는 김열경이라는 사람이 삼가 발문을 쓴다는 뜻이다.

   췌세옹이 김시습이 사용하던 호(號) 중 하나이며, 열경(悅卿)이 그의 호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보물 지정 과정에 이 전적 조사를 담당한 서지학자 송일기 중앙대 교수는 이 발문이 "김시습이 쓴 글이라는 점은 주목했지만, 함께 지정된 보물 목록이 많은 까닭에 그에 대한 남다른 의미를 부여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면서 "내 기억으로는 이 복장유물에 김시습의 발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 내용이나 형식 또한 수능엄경의 그것과 흡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발문은 아직까지 학계에서 본격적인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이런 글이 존재하는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수능엄경 발문의 작성 시기가 김시습이 사망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끈다고 안씨는 말했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김시습은 1493년 2월에 무량사에서 숨을 거뒀다.

   이로써 본다면 이 수능엄경 발문은 현재까지 확인된 김시습 글 중에서 최후로 작성한 것이 된다.

   나아가 안씨는 이 발문 내용을 분석하면 지금까지 미궁으로 남은 김시습의 부여 행(行)을 해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문에서 김시습은 임자년(壬子年.1492) 가을에 서해안 명산을 돌아다니다가 무량사에서 옛 친구(故舊)인 지희(智熙)라는 승려를 만나 그의 부탁으로 1488년에 간행된 수능엄경의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이로써 본다면 김시습이 무량사로 가고, 이곳에서 입적하게 된 것은 지희라는 친구가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희는 누구일까?

안씨는 1485년 김시습과 같은 생육신인 남효온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만났다고 기록한 표훈사(表訓寺) 주지 지희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김시습 또한 그 이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에 대한 글을 남기기도 했으므로 지희와는 전부터 아는 사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무량사에는 현재 김시습의 부도(유골을 넣은 묘탑)와 초상화가 전한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