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투기자의'촌지실록'<9>육해공 동원한 화려한 지역경제취재의 진실
한국은행 출입기자들의 '출장' 사례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행은 일반적으로 돈을 찍어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돈이 많은 곳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니 '낑'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찍어내는 곳은 한국은행이 아니라 조폐공사다. 한국은행은 이를 주관하고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돈이 많은 곳이 아니다. 이른바 '물 좋은' 노른자위 출입처는 한국은행 따위는 저리 가라고 할 만큼 많다. 적지 않다. 단지 한국은행을 사례로 들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김봉투 기자는 이런 해괴한 '지방취재'를 제법 많이 했다. 1년에 1∼2 차례는 지방출장을 거의 거르지 않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출장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김봉투 기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지방출장이 더러 있다.
198x년 봄이었다. 반 팔 티셔츠를 걸쳤으니 아마도 5월쯤이었다. 한국은행이 아닌 다른 곳을 출입할 때 갔던 출장이다. 출장 명분은 마찬가지였다. 역시 '지역경제 취재'였다.
김봉투 기자와 일행은 '마산 지방'의 지역경제를 취재하기로 했다. 어떤 출장이든, 절차는 거의 똑같았다. 버스에 기대앉아 눈들을 부릅뜨고 고스톱을 즐겼다. 느긋하게 저녁 무렵 마산에 도착했다.
대기업 관계자들이 김봉투 기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면상 지역경제와 대기업의 현황을 듣기로 했다. 자료까지 유인물로 만들어 기자들에게 한 부씩 돌렸다. 기자들에게는 현황 설명을 듣는 것도 취재였다.
그렇지만 한쪽 귀로 들으며, 한쪽 귀로는 흘려버렸다. 메모도 하는 척만 했다. 메모했던 종이는 휴지통으로 던져버렸다. 하나마나한 메모였기 때문이다. 기사도 쓰지 않을 것을 메모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취재하는 흉내를 냈을 뿐이다. 김봉투 기자 일행에게는 염불보다 잿밥이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룸살롱을 갔다. 모두들 취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들을 내뱉었다. 대기업이 잡아준 호텔에서 모두들 엎어졌다. '낑'도 각자 챙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마산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이튿날이 밝았다. "이곳까지 와서 '할매 김밥'을 먹지 않을 수 없다"며 충무로 달려갔다. '할매 김밥'을 먹다보니 날씨가 너무나 화창했다. 따뜻한 봄 날씨였다. 그 날씨가 문제였다. 뭔가 일을 저지르고 싶어졌다. 즉석에서 '간이 기자총회'가 열렸다.
'간이 총회' 결과, 한산도를 참배하기로 했다. 충무공의 정신을 되새겨보기로 합의한 것이다. 기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곧바로 표를 끊고, 배를 탔다. 나무가 울창한 한산도를 모두들 엄숙한 심정으로 둘러봤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렇지만, 일정을 또 바꾸고 말았다. 오랜만에 배를 타고 한산도를 구경하다 보니 배를 조금 더 타고 싶어진 것이다. 몇몇 기자들이 내친 김에 배를 타고 한려수도를 관광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의견을 내놓았다.
다음 방문지는 물론 예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도 관계자들이 '무관의 제왕'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현황 설명자료까지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려수도를 관광할 경우,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람맞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들은 '무관의 제왕'이 찾아온다는 바람에 할 일들을 제쳐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약속만큼은 지켜야 했다. 약속을 어기면 미안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무관의 제왕'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한려수도를 관광하기로 했다.
김봉투 기자 일행은 두 패로 갈라졌다. 일부는 한려수도를 관광하고, 나머지는 당초 일정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김봉투 기자는 한려수도 관광 쪽이었다.
화창한 봄날의 한려수도는 과연 그림이었다. 쾌속선이 달리는 느낌 또한 흐뭇했다. 쾌속선은 아름다운 그림 속을 이리저리 누비다가 부산까지 달렸다.
부산에 도착하니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일정을 멋대로 취소하고 왔기 때문에 마중 나온 사람도 있을 수 없었다. 곧바로 김해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상경하기로 했다.
김봉투 기자는 이렇게 버스→배→비행기로 이어지는 '멋진' 취재를 즐겼다. 그랬으니 '육해공 출장'이었다고 부를 만했다. 호화판 출장이었다. (2006.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