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들이 전하는 시인 김춘수의 추억
2008-08-12 뉴스관리자
4년 전 세상을 뜬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를 그리는 특별한 책 한 권이 출간됐다.
'할아버지라는 이름의 바다'(예담 펴냄)는 시인의 손녀 유미(25)와 유빈(18) 양이 할아버지 김춘수와의 애틋한 추억들을 기록한 책이다.
시인이 생전 끔찍이도 아끼던 두 손녀가 기억하는 김춘수는 위대한 시인의 모습보다는 손녀에게 한없이 약하고 인자했던 보통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소설가를 꿈꾸고 있는 유미 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살던 강동구 명일동 집에서 보냈던 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번에는 할아버지한테 토끼 인형을 갖게 하고 내가 곰을 가진 뒤 '토끼야 안녕?'하면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나한테 또 '토끼야 안녕?'하고 대답하여 나에게 무수한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시고 급기야 놀이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어버리시는 것이었다."(65쪽)
좀처럼 집중하지 않은 채 참여하는 인형놀이로 손녀를 울리고, 백일장 놀이를 하자던 손녀에게 '선풍기', '전화기' 따위의 성의 없는 시제를 귀찮은 듯 던져줘 손녀를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손녀가 아무렇게나 써놓고 간 시를 정성껏 고쳐 보내줄 정도로 세심하다.
유치원생 손녀가 넓은 놀이공원에서 혹시 길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며 소풍 가는 손녀를 '미행하는' 시인의 모습은 시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손녀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까지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이제 대학 입시를 앞둔 문학소녀 유빈 양도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이 많다.
할아버지가 올 때마다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 그동안 그린 그림과 동시, 일기장, 독후감 등을 보여줬던 일, 여섯 살 때 쓴 부끄러운 첫 단편소설과 할아버지 생일선물로 준비한 십자수를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일 등이 따뜻한 가족영화처럼 그려진다.
많은 인형 중 손녀가 대머리 인형을 고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할아버지에게 손녀가 "할아버지는… 자기도 대머리면서…"라고 말해버린 일은 웃음을 자아낸다.
류기봉 시인은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유미, 유빈이의 글은 어쩌면 미숙할 지도 모르지만 사물을 보는 시선은 예사롭지 않다. 작품 행간마다 생의 원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며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문학을 꿈꾸는 두 손녀들을 격려했다.
책 속에서는 생전 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시인이 직접 손녀들에게 쓴 편지들도 볼 수 있다.
312쪽. 9천800원.(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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