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말이 되기에 너무 애달팠던 그들의 이야기

뮤지컬 ‘침묵의 소리’

2009-09-10     뉴스관리자

말은 인간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생각, 엄청난 감정을 맞닥뜨린 사람은 오히려 말이 없어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일이 한 사람을 60년간 침묵하게 할 수 있을까. 뮤지컬 ‘침묵의 소리’는 긴 세월 실어증을 앓다가 일본의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난 故 김백식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가 남긴 것은 유골과 약간의 돈, 조선 국적의 외국인 등록증, 그리고 말이 되지 못하고 남겨진 이야기다. 한 사람의 마음과 목소리로는 감당할 수 없어 침묵이 돼버렸던 상처에 뒤늦게 귀를 기울여 본다.

- 개인의 어깨 너머로 보는 전쟁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 결코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식민지 시절과 태평양 전쟁의 비극들이 어떻게 그려질지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다. 이 점에서 뮤지컬 ‘침묵의 소리’는 역사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택한다. 전쟁으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한국과 일본의 연인, 생사의 기로에서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한중일의 세 친구들, 정신적 충격으로 마음을 닫은 한국인 동진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일본인 간호사…. 90분 간 무대에서 보이는 것은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큰 틀에 가려져 있던 평범한 개인들의 아픔이다. 잘잘못을 가르는 역사적 판단이 아니라 국적을 뛰어넘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손길이다. 관객들은 교과서와 신문의 글로만 읽던 전쟁을 그와 그녀, 너와 나의 이야기로 만나게 된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주제였지만 뮤지컬 ‘침묵의 소리’는 나름의 확고한 시각을 드러낸다. 판단은 보는 이의 몫이다.

- 하나의 공연을 만들기 위해 맞잡은 두 나라의 손
최초의 한일 합작 뮤지컬인 이 작품은 양국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공동 작업을 했다. “서로 달라서 더욱 잘 어우러지는 것 같다. 한국이나 일본의 색깔이 아닌 제 3의 색깔이 나올 것”이라던 장소영 작곡가의 말대로, 공연에서 괴리감이나 어색함은 찾기 어렵다. 정영두와 칸자키 유후코가 맡은 안무는 감정과 상황을 효과적으로 살리며 극 안에 녹아들어간다. 카토 치카가 디자인한 독특한 형태의 무대는 물리적 전환은 거의 없었으나, 이중우가 작업한 창의적인 조명과 합쳐져 매 장면 다양한 배경과 분위기를 소화한다. 뮤지컬의 모든 요소들을 놀라울 만큼 멋지게 이용한 히로시마 원폭장면은 백미다.
9월 4일 첫 공연에는 간호사역의 카타기리 마사코와 노인동진역의 카나오 테츠오, 두 명의 일본 배우가 무대에 섰다. 두 사람은 일본 말로 노래와 연기를 하고 무대 오른쪽에 한국말 자막이 나왔다. 반대로 한국배우들이 한국말로 연기할 때는 일본 관객들을 위한 일본 자막이 나왔다. 내한공연이 아닌 국내공연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두 배우의 목소리와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언어장벽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전달됐다. 다만 자막에서 몇 번 생긴 기술적 문제와 자막위치로 인한 2층 좌석의 시야장애 문제는 서둘러 해결돼야겠다. 미와 역의 우현아, 안도 역의 이경준을 비롯한 한국 배우들도 훌륭하게 몰입한 모습이었다. 동진 역의 민영기가 극의 절정에서 부른 솔로곡 ‘너 없는 세상’은 공연장이 터져 나갈듯한 성량과 감정으로 객석으로 압도했다.

- 치유(therapy)를 기대한 관객에게 남는 아쉬움
뮤지컬 ‘침묵의 소리’가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독특한 장르다. 테라피(therapy)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장르는 작품의 내용과 예술치료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들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대에서 보인 테라피 효과는 작품의 전반에 내세우기에는 부족하다. 예술치료 장면의 비중은 예상보다 작았고, 이야기에서도 현재 동진이 치유되는 과정보다는 과거 동진의 상처에 초점이 맞춰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액자식 구성을 비롯해 공연의 전체적 흐름이 다소 매끄럽지 못했던 영향도 있다. 시간을 두고 다듬어져야 할 부분이다.
주인공들의 추억이 담긴 풀피리, 두 연인의 안타까운 순애보를 상징하는 학 등 독특한 소재는 공연 초반 순수하고 동화적인 분위기에 큰 몫을 한다. 관객에게 동심과 애틋함을 느끼게 해주는 치유적 소재기도 하다. 이들이 공연 안에서 좀 더 인상적으로 활용된다면, 공연 후반 강렬한 전쟁장면의 무거움과 균형이 맞춰지며 뮤지컬 ‘침묵의 소리’만의 개성도 더욱 확실해지는 일석이조가 될 것이다.

[뉴스테이지=이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