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in] 슬픔의 한(恨), 그 거대한 기록
뮤지컬 ‘침묵의 소리’ 김동진
2009-09-14 뉴스관리자
억울하거나 서러울 때 우리는 전화를 건다. 말하고 나면 시원해지나 듣는 이가 먹먹해지고 마는 그 한(恨)을 쏟아내기 위해서. 그러나 뱉어내기에도 너무 아파 말로 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 여기 60년 동안 침묵을 지킨 노인의 세월이 그렇다. 노인의 눈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으나 그 시선을 함께 따라갈 수가 없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 시절의 어머니, 친구, 전우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 미화.
요양원에 있는 노인은 세월의 잔인함에 찢겨진 누더기 외투를 벗고 환자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그의 얼굴을 잿빛으로 만든다. 노인은 흐르는 시간에 순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묶여 눈물만을 흘린다. 그가 90분 동안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 노인의 이름은 김동진이다.
김동진은 전쟁의 농락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반복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없는 아픔을 안은 채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대변한다. 그의 절규를 듣고도 무표정한 세상이 비정하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오랜 시간 듣고 보고 경험해서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매 순간 아프다.
뮤지컬 ‘침묵의 소리’는 일본의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둔 조선인 김동진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희망, 그리고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여기에 가해자는 없다.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 그리운 것들만을 간직하고 있는 김동진의 모습 옆으로 펼쳐지는 그의 과거는 희망을 무너뜨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김동진의 일생은 한편의 작품으로 아우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시간과 공간을 지난다. 그가 걸어간 길에 남은 것은 현금 4만 엔과 하얀 유골, 그리고 조선 국적이라고 적힌 외국인 등록증이 전부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김동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공연의 마지막 즈음 그가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들어주어서 고맙소!”
[뉴스테이지=이영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