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또 다른 나,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뮤지컬 ‘살인마 잭’ VS 연극 ‘루시드 드림’
2010-01-21 뉴스관리자
일찍이 지킬박사는 자신안의 ‘또 다른 나’를 분리시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그 자아를 한없이 저주했다. 하이드를 보며 ‘너는 내가 아니다’라고 가능성 없는 부정을 반복하다 결국 무력하게 패배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어떤 일을 저지르고 ‘그건 내가 아니었어’라고 말할 때. 그렇다면 내가 아닌 그는 누구일까.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두렵다. 그리고 짜릿하다. 당황스러운 이 모든 상황을 진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몰랐던 그가 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삶이 한결 수월해진다. 또 다른 나와 마주하게 되는 두 작품, 뮤지컬 ‘살인마 잭’과 연극 ‘루시드 드림’이다.
‘나’의 또 다른 이름, 그것은 살인마
두 작품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살인마’로 표현된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형상을 갖고 인물(캐릭터)로 등장한다. ‘나’와 ‘내’가 대화하며 싸우고 손을 잡고 협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짜릿한 순간은, 바로 ‘나’와 ‘내’가 만나는 순간이다. 뮤지컬 ‘살인마 잭’의 다니엘은 사랑하는 여인 매춘부 글로리아를 구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그녀의 고용자인 잭을 살해한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잭이 다니엘을 찾아오며 관계는 시작된다. 연극 ‘루시드 드림’ 속 만남은 조금 더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무채색의 어두운 방, 변호사 최현석에게 일주일 전 사망한 선배 김선규의 미망인이 찾아온다.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건넨다. 어느 부분부터 이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이 이동원으로 바뀌어있다. 이동원은 김선규가 변호를 맡았던 인물로 모두 열세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최현석은 여기에 자극을 받고 이동원의 변호를 자처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살인마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 안에서 가장 강렬하면서도 금기시되는 욕구가 바로 살인이다. 이들에게는 그 두려움을, 죄책감을 덜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잭과 이동원은 그들의 면죄부인 셈이다. 이는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시키려는 동시에 살인의 행동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하는 오류에서 발생한다.
‘나’의 또 다른 이름, 그것은 신(神)
우리는 상상 속에서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 그 안에서는 못할 것이 없다. 누군가와의 사랑도, 화해도, 평화도 쉽다. 싸움도, 승리도, 전쟁도 쉽다. 그리고 살인도 쉽다. 상상의 중독성은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아무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현실과의 괴리감을 만끽할 수 있는 그 짜릿한 자유로움. 매 순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상 속 간음과 살인은 아무런 죄의식도 갖지 않은 채 도돌이표를 찍은 후 다시 반복된다. 그러나 침범할 수 없는 커다란 상상의 풍선에 작은 구멍을 낸 사건이 있다. 일찍이 성경은 말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으니….” 이미 간음을 하였으니! 상상 속에서 행복한 꿈을 꾸다가 이것이 현실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현실의 나는 고립돼 있다. 이 간극을 파고드는 연극이 바로 ‘루시드 드림’과 뮤지컬 ‘살인마 잭’이다. 현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내 안의 살인마와 계약을 맺고 악수를 한 후다.

과연 이들에게 동정은 가능한가, 상상 속 살인은 죄가 되지 않는가, 두 작품은 이 물음을 남긴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다양한 뮤지컬 ‘살인마 잭’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그리고 성경과 맞물려 있는 연극적 연극 ‘루시드 드림’은 지금도 유니버설아트센터와 산울림소극장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고 있다.
[뉴스테이지=이영경 기자,사진_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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