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보호법이 되레 소비자 목 죈다
차 4번 고장 목숨 걸어야 교환 가능.. 업체에 '면죄부'
지난해 1월 부산 장림동의 최 모(남.43세)씨는 구입한지 반년 된 G사의 차량에서 주행 중 시동이 꺼지는 하자가 발생했다. 불안한 마음에 즉시 업체 측에 교환을 요구했지만 묵살됐다. 화가 치민 최 씨는 소비자 보호관련 규정을 찾아보고 맥이 풀렸다.
소비자 보호를 위해 만들었다는 소비자기본법이 되레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 소비자기본법의 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차량 교환을 받으려면 동일 증상이 4번 발생해야 했다.
주행 중에 시동이 꺼지는 끔찍한 경험을 3번이나 더 겪어야 차량을 바꿔준다는 이야기였다. 최 씨는 “소비자기본법에 따라 차량을 교환 받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소비자 보호법이 소비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소비자의 목을 조이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소비자의 권익 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소비자 기본법 곳곳에 소비자에게 치명적인 독소조항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특히 동일하자가 4번 발생해야 교환이나 환급이 가능토록 한 규정이 업체들의 ‘면죄부’ 역할을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온라인쇼핑으로 구입한 전자제품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여부를 알려면 우선 전원을 키거나 코드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소비자기본법에 따르면 소비자가 제품의 가치를 훼손했기 때문에 교환이나 환급이 불가능해진다. 소비자기본법은 지난 1980년 제정돼 14번에 걸쳐 개정됐으며 공정거래위원회의 관할에 있는 법이다.
◆결함 자동차 교환 받으려면 목숨을 걸어라?
현행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차량 교환 및 환급을 받기 위해서는, 차량인도일로부터 1개월 이내에 조향·제동장치와 엔진 등 주행 및 안전과 관련한 중대한 결함이 2회 이상 발생했을 경우 또는 중대결함 동일하자가 4회째 발생하거나 수리기간이 누계 30일(작업일수기준)을 초과해야만 한다.
1개월 안에 중대결함이 두 번 이상 발생하는 것도 끔찍한데, 그 기간을 넘길 경우 치명적인 결함, 그것도 같은 결함이 4번이나 발생할 때까지 운전을 해야 하는 게 소비자의 처지다. 결국 차량을 바꿔줄 때까지 문제 있는 차를 목숨 걸고 운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천 숭의동의 안 모(여.29세)씨는 지난해 4월 구입한 H자동차 차량에서 주행 중 핸들 잠김 현상이 발생해 대형 충돌 사고를 당할 뻔 했다. 불안한 마음에 즉시 결함 차량에 대한 교환 및 환급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강력하게 항의하며 실랑이도 벌여봤지만 소비자 분쟁해결기준에 막혀 한 치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보상규정에 따라 정비를 충실히 해주고 있다. 제품의 단가가 높아 업체의 자발적인 교환·환급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비자들은 “4회는 되고, 3회는 안 되는 자의적인 보상규정이 소비자의 목숨을 담보로 업체의 이익만 보호하고 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 누구를 위한 분쟁해결기준인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품의 하자 또한 4회째 발생해야 교환·환급 받을 수 있다. 고장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시간적 손해는 모두 소비자의 몫이다.
지난해 9월 서울 당산동의 오 모(여.37세)씨는 2007년 구입한 D사 냉장고가 작동하지 않는 고장으로 큰 불편을 겪었다. AS를 받았지만 이 같은 하자는 2년간 세 번이나 반복됐다. 그런데도 교환 요청은 소비자 분쟁해결 기준에 걸려 번번이 묵살됐다. 이제는 보증기간이 끝나 유상수리를 받아야할 처지. 안 씨는 오늘도 냉장고가 무사할까 하는 걱정을 안고 출근한다.
가전제품의 교환 및 환급 규정은 1년간 4회째 동일 하자가 발생하거나, 여러 부위 5회 수리를 받아야 한다.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게임기 등 IT기기제품 구매와 관련한 소비자들의 억울함은 더하다.
전원을 켜거나 코드를 꽂아 보지 않으면 제품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수 없음에도 가치훼손이라 여겨져 청약철회를 할 수 없기 때문. 전자상거래법, 방문판매법 등에 따르면 제품의 겉포장을 제외한 비닐포장을 벗긴 경우, 코드를 꽂거나 전원버튼을 눌렀을 경우가 가치훼손에 해당한다.
물론 소비자는 분쟁해결기준에 따라 가치가 훼손됐을 지라도 제품이 수리가 필요한 상태의 하자가 있다면 1개월 이내에 교환 및 환급을 요청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하자의 판단 기준을 업체 측이 정하고 있는 것. 소비자가 하자 제품이라고 주장해도 업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변심으로 판단하면 보상이 불가능해진다.
지난해 11월 화성시 안녕동의 이 모(여.37세)씨는 홈쇼핑을 통해 구입한 디지털카메라가 제대로 작동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집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던 중 액정의 노이즈를 발견하게 됐다. 즉시 환급 요구를 했지만, 업체 측은 ‘노이즈는 고감도 촬영을 할 때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라며 단순변심으로 몰아 거절했다.
◆소비자 보호 규정은 단순 권고사항?
일부 업체들은 소비자기본법의 시행령인 소비자보호규정이 미흡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보다 강화된 자체규정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교환부품의 보상규정은 2개월이나 소비자 편의를 생각해 1년간 보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귀뚜라미보일러, 하이리빙 등의 업체들도 6개월간 교환부품을 자체적으로 보증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분쟁해결기준은 정부기관, 업체, 소비자단체 등이 의견을 합치한 내용으로 만들어졌다. 품질보증서상에 명시돼 있지 않은 문제가 생겼을 때 업체와 소비자간 분쟁을 조정·중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권고사항일 뿐, 법적 강제성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따라서 하자를 판단하는 기준을 정부가 제시할 수는 없다. 품질보증기간 또한 업체 자율”이라고 말했다. 다만 “1~2년마다 소비자불만을 파악하고 상황에 맞춰 규정을 개정해 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