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연극의 존재이유에 대한 고전적 성찰
경제 한파와 구조조정의 공포, 청년 실업자의 증가에 따른 니트족의 급증, 그칠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와 집값의 상승. 신종 플루의 여파에 살인사건까지 난무하는 현실은 먹고살기도 팍팍한 현실을 벼랑 끝까지 내몰아간다. 이러한 시국 속에서 연극이 갖는 존재의의는 과연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우지체와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당면해있는 현실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연극은 여전히 한가로운 놀음으로 비춰질 따름이며,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유희를 즐길 여유는 유감스럽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은 한갓 환상에 불과하며 무대에서나 존재할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유랑극단 쇼팔로비치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기에 곱지 않을 수밖에 없다. 포격 소리가 횡횡하고 총살된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판국에 곱게 분칠한 얼굴로 화려한 의상을 빼입고는 대본 연습에 여념 없는 배우들의 모습은 광인(狂人)으로 비춰질 따름이다. 필립의 과장된 행동들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며 마을 사람들과의 마찰을 빚어내고 단원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연극적 환상에 아랑곳없이 사형집행인 드로바츠의 채찍은 언제나 그랬듯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 마를 날이 없고, 기나의 대야에는 피 묻은 수건들이 가득 들어서있다.
하지만 이들의 연극적 환상은 예기치 않은 대반전을 만들어낸다. 필립이 읊조리던 대사는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돼 죽음의 위기에 놓인 기냐의 아들을 구해내고, 소피아의 연기는 인간 분쇄기 드로바츠의 영혼을 감화시킨다. “나무칼로는 쇠칼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단 말인가?”라고 부르짖던 필립은 16세기의 시간들을 넘나들다 <햄릿>의 숨결로 장렬히 생을 마감하며 연극적 환상을 종교적 위상으로 승격시킨다.
그렇다면 연극은 정녕 현실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50미터만 가면 영국이고 5분만 지나면 16세기에 도착할 거예요”라며 정처 없는 유랑길에 나선 배우들은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이들을 마중 나온 심카의 말을 듣지 못한다. 수레국화 한 송이를 손에 쥔 채 목을 매단 드로바츠의 후일담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연극적 생으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떠도는 유랑극단의 면모는 연극적 환상의 힘을 역설하는 이들의 진중함에 약간의 신파를 덧댄다. 스틸컷을 연상케 하는 필립의 전사 장면이나 그가 쓴 유서, 반복되는 배우들의 마지막 넋두리는 묵직한 울림보다는 화려했던 지난날에 부치는 고배에 그친다. 희생과 구원으로 연극적 힘을 설파하는 이상적 결말은 바벨탑의 환상에 갇혀 죽어가는 연극의 생을 아름답게 박제시킨다.
(뉴스테이지=박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