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불만 해결,'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면?'
2010-03-17 백진주 기자
보험혜택을 제대로 받았다고 생각하던 이 씨는 지난해 우연히 자신의 상처가 상해가 아닌, 질병으로 처리돼 보험금이 낮게 산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상해일 경우 최소 3천만 원이 지급돼야 한다는 것. 이 씨가 진단서를 첨부해 연락을 취하자, 보험사는 학계 보고와 자문을 거쳐 이 씨의 사례가 상해인지, 질병인지를 확인하겠다고 나왔다.
이 씨가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내자 보험사는 바로 태도를 바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대형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자신이 없었던 이 씨는 결국 소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보험사 앞에서 춥고 외로운 1인 시위에 나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씨를 길거리로 내몬 L사 경영이념은 ‘고객의 희망을 지키는 기업’이다.
이런 일은 비단 이 씨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객만족 경영을 외치는 금융회사들이 막상 분쟁이 발생하면, 소송부터 제기하는 게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금융감독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분쟁조정 신청 2만8천988건 가운데 1천656건이 소송으로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1천435건은 소비자가 아닌, 금융회사에서 제기한 것이었다.
보다 못한 금감원은 금융회사 임원들과 간담회를 열어 무분별한 소송 제기를 억제하도록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또 보험사가 불필요한 소송을 통해 보험금 지급을 거절 또는 지연해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소비자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낼 수 있도록 보험약관에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
금융회사들이 돈벌이에 급급해 소비자를 봉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면 금융권만 문제일까?
최첨단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보통신업계도 이 같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국회 문화관광체육방송통신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안형환 의원(서울 금천)이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3년간 이동통신 관련 통신사별 위약금 분쟁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소비자 불만에 대한 이동통신사들의 대처도 매우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통위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이동전화서비스에 관한 소비자상담건수는 총3만1천705건이었지만 이중 피해구제를 받은 건수는 4.2%에 불과한 1천340건에 그쳤다.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은 2812건의 상담건수 가운데 겨우 62건(2.2%)만 피해구제가 이뤄졌다. 더구나 지난 2007년 5.81%였던 피해자구제율이 2008년 4.5%, 2009년 2.19%로 해마다 낮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통신사들이 입만 열면 고객감동을 외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통신사들의 무성의는 고객센터 운영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근 KT와 SK텔레콤은 잇달아 스마트폰에 대한 고객센터 업무시간을 휴일까지 연장하고 관련 인력을 늘리기로 했다.
얼핏 들으면 반가운 소식이지만, 일반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대다수 고객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국내 스마트폰 이용자가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반 휴대전화의 경우 주말과 휴일에는 분실/습득 신고 외에는 처리되는 민원이 거의 없어 고객들이 소액결제 등으로 피해가 발생해도 평일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비자들은 문제가 생겨도 지레 포기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지난해 식품피해사례에 대한 소비자의식조사를 벌인 결과, 식품관련 피해경험은 첫 조사 때인 2008년 26.9%에서 2009년 32.9%로 높아졌다. 이 가운데 제조업체나 구입처에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37%에 불과했다. 민간소비자단체(7.9%)나 정부기관(1.7%), 인터넷이나 언론매체(2.3%)에 제보한 경우까지 합쳐도 불만제기율은 절반을 밑도는 48.9%에 그쳤다. 반면 피해를 입고도 무시한 경우가 51%로 과반을 차지했다. 그 이유는 귀찮아서가 35.8%로 제일 높았고, 신고해도 잘 처리될 것 같지가 않아서라는 대답이 31.6%로 나타났다.
소비자들이 기업을 상대로 불만을 처리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성가신 일인지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불만을 제기하더라도 그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다. 식약청 조사에서 식품 피해를 적극적으로 호소했던 소비자들이 해당 업체의 사후조치에 대해 느낀 만족도는 5점 만점에 평균 2.86점에 그쳤다. 이론적인 평균치인 3점에도 못 미치는 불만스런 수준이다.
실제로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에 피해를 제보하는 소비자들은 기업과 먼저 접촉을 했다가 업체 측의 무성의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객을 위해 일한다는 고객센터 직원들은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들을 ‘블랙 컨슈머(고의적으로 악성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로 몰아가기 일쑤고, 심지어 일부 영세업체들은 고객상담 전화가 늘 통화중이거나, 연결조차 되지 않는다.
설령 연락이 이뤄진다고 해도 과실이 업체 측에 있다는 것을 소비자가 애써 증명해야 한다. 간혹 환불을 해주겠다고 문제가 있는 제품을 수거해 간 뒤에 오리발을 내미는 기업들도 있다. 제도적 보호 장치도 미흡하기 짝이 없다. 대표적으로 소비자를 위해 제정된 소비자보호법조차 소비자에게 불리한 규정 투성이다.
이처럼 수많은 장애요소들 속에서 소비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똑똑해져야 한다.
무작정 목청만 높일 것이 아니라 ‘소비자분쟁해결기준’등의 관련법에 대한 기본 지식을 공부하고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 어떤 객관적 증거자료가 필요한지에 대해 꼼꼼히 알고 있어야만 ‘공룡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