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등골빼는 데는 법도 없다?
정신지체2급에 휴대폰 개통..청각장애인에게 "다 설명했다"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백진주 기자] 장애인이 주체가 된 거래를 두고 보호자들과 업체 간의 분쟁이 잦아지고 있다. 의사결정 능력이 미약한 장애인을 상대로 아무런 확인 절차 없이 부당계약을 했다는 가족들의 주장에 대해 업체 측은 의사결정을 문제삼을만한 장애 수준이 아니었다며 맞서고 있는 것.
현행 민법상 지적장애 등으로 한정치산자로 선고를 받은 경우, 보호자가 나서서 계약을 무효화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청각∙시각 장애인이나 초기 치매 환자의 경우 한정치산자에 속하지 않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또 ‘장애의 정도에 따른’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적용해 되레 분란의 소지를 제공하는가 하면, 아예 아무런 법적 기준이 없어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 장애인을 주제로 한 영화 '말아톤'(좌)과 '잠수종과 나비'
◆ 청각장애인이지만 의사소통 가능했다?
대구 송현동의 임 모(남.49세)씨는 최근 청각 장애인이 형의 집을 방문했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청력장애 2급의 임 씨의 형 앞으로 매달 K사의 정수기,공기청정기 렌탈요금 7만5천500원, 연수기 할부금으로 4만8천원 가량이 청구되고 있었던 것.
형에게 상황을 물어보자 아파트로 방문한 영업직원의 따뜻한 환대가 반가워 구체적인 내용도 인지 못한 채 덜컥 계약을 해버렸음을 알게 됐다.
임 씨는 “청각 장애를 가진 형은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인지할 뿐 어려운 용어 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글도 읽지 못해 렌탈이나 임대 등의 개념조차 모른다”고 설명했다.
10평도 채 안 되는 아파트에 설치된 정수기와 연수기 등은 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었고 기초수급자로 국가에서 지원받는 29만원 중 일부가 고스란히 렌탈 및 구입비용으로 7회 이상 인출된 상태였다. 부랴부랴 임 씨가 계약서를 확인했지만 엉성한 형의 사인만 기재되어 있을 뿐 렌탈 기간이나 비용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업체로 계약취소 및 기납입금 환불을 요구하자 “본인의 직접 서명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며 거절했다.
임 씨는 “잠시만 이야기 해보면 형이 청각 및 언어장애자란 걸 알 수 있다. 기초수급자를 상대로 350만원 가량의 제품을 강매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이어 “1평짜리 화장실은 혼자 쓰기도 불편한데 연수기라니...아무리 실적도 좋지만 너무하지 않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에 대해 C사는 "계약자가 왜 관리를 나오지 않느냐라는 문의 전화를 했던 이력이 있는 만큼 의사파악이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기초수급자로 경제적인 부담이 큰 점을 감안해 전액 환불 처리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예정”이라고 답했다.
◆ 보호자 동의 없이 정신지체장애인에 휴대전화 개통
익산시 송학동 박 모(남.35세)씨의 처남은 20대 중반의 나이지만 정신지체 2급의 장애인으로 의사결정을 혼자 할 수 없어 부모님이나 가족 등의 보호를 받고 있다. 문제는 지난해 9월 처남이 혼자 휴대전화를 개통해 버린 것.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 기존에 쓰던 휴대전화를 버리고 새로운 휴대전화를 개통해 버렸다. 가족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몇 달 뒤 집으로 20만원 가량의 사용요금이 청구되는 바람에 이를 알게 됐다.
보호자 없이 휴대전화를 개통했다는 사실에 당황한 박 씨가 개통 대리점에 문의하자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와 신청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답했다. 해당 통신업체 관계자는 "보호자 없이 개통은 안 된다"는 원칙만 고수할 뿐 뚜렷한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박 씨는 "대리점과 고객센터는 서로 책임을 미루는 사이, 요금청구서만 늘어나고 있다"며 하소연을 했다.
다행히 박 씨는 장애에 대한 증빙자료를 제출하고 요금을 감액 받았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정신지체장애인의 이동통신 가입은 법적인 규정 없이 각 통신사의 개별 기준이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1,2급은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고 3급의 경우는 스스로 가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관례"라고 전했다.
◆ 칠순 치매환자에게 신문 구독
경남 마산의 황 모(여.39세)씨는 몇 달 전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져 초기 치매증상을 보이는 칠순이 넘은 아버지 앞으로 신문 구독료가 청구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정상적인 생활은 물론, 초기 치매 증세로 판단력이 흐려진 아버지가 신문 구독을 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진 황 씨가 사실 확인에 나섰다.
내용인즉, 몇 달 전 휠체어를 타고 바람을 쐬고 들어오던 아버지는 신문구독 영업을 하는 한 남자로부터 장황한 설명을 듣게 됐다. 돈 봉투를 내밀며 서비스 운운하는 남자의 말에 내용을 인지하지 못한 아버지는 건성건성 대답하고 돌아선 것으로 그만 계약이 체결된 것.
황 씨가 해당지국으로 연락해 취소 처리를 요청하자 계약당시 받은 4만원과 3개월간 무료로 지급받은 돈을 위약금으로 청구했다.
황 씨는 “계약서 작성 등의 기본적인 절차도 없이 허위계약을 하고 위약금을 언급하는 업체의 뻔뻔함에 치가 떨린다. 한 눈에도 정상적인 대화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조건 몰랐다고 우기면 끝이니 어이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입장을 요청하자 해당 지국은 담당자가 없다며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한편, 이같은 문제가 잇따르면서 장애인에 대한 소비자 보호규정을 강화하고,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녹색소비자연대 이주홍 팀장은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장애인들에 대한 법적 보호제도가 너무나 미흡하다. 심지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이용약관’ 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필요한 법적 제도에 대해 “미성년자와 마찬가지로 장애인들도 법적보호자의 동의 절차를 거치도록 제도화하면 관련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