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현의 스테이지피플] 배우 이정열

노래하는 방랑자, 그의 엔지니어

2010-06-10     뉴스관리자


고양, 성남 공연을 거쳐 지난 달 서울로 입성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 6개월이라는 긴 공연 기간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이제 막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미스 사이공’은 소위 스타 캐스팅에 기대지 않고 작품의 힘, 배우의 역량만으로 우직하게 승부하고 있는 요즘 보기 드문 작품이다.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흔히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의 뒤에는 보다 치밀하고 드라마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여주인공 킴을 환락가로 이끄는 혼혈 포주 엔지니어의 삶이다. ‘미스 사이공’이 던지는 메시지 자체로, 전쟁의 비극성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 엔지니어. 작품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엔지니어 역은 2006년 초연 멤버인 김성기와 함께 바로 이 사람, 이정열이 분하고 있다.


- 엔지니어, 연기 인생의 진정한 터닝 포인트


“솔직히 말씀 드리면 '다들 보니까 나도 한번 봐볼까'하는 마음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제 위아래로 15년 터울의 배우들은 다 봤으니까요. 공연을 본 적도 없고 캐릭터에 대한 정보도 없었죠. 1차 오디션 자유곡으로 평소 즐겨 부르던 ‘어니스티(honesty)’를 준비해갔는데, 음악 감독인 가이 심슨이 엔지니어 오디션 보는데 어니스티를 부르다니 한국 배우들 자세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저를 긁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에게서 뭔가를 끌어내기 위한 작전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땐 열이 확 받더라고요. (웃음)”
한국 배우 운운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이정열는 ‘당신들이 선택하던 말던 엔지니어는 나요. 다음에 봅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오디션장을 나왔다. 기대하지 않았던 2차 콜을 받고 그는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라는 인물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극의 긴장을 풀어주는 어릿광대 정도로 생각했던 엔지니어는 파고들수록 흥미롭기 그지없는 캐릭터였다.
“‘미스 사이공’은 시종일관 엔지니어가 있는 곳에서 펼쳐지는 얘기예요. 엔지니어의 시선이 가는 곳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죠. 이런 어마어마한 캐릭터가 어딨어요. ‘아메리칸 드림’ 넘버를 연습하면서 이거는 1막 초중반쯤에 들어가서 이 인물을 소개하는 노랜가 보다 했는데. 웬걸? 2막의 맨 끝이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이야기는 이 노래를 하기 위한 장치인 거예요.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미스 사이공’은 엔지니어의 인생놀음이 아닐까 싶어요.”
이정열에게서 색다른 에너지를 발견한 제작진은 그만의 색깔과 해석이 담긴 엔지니어를 선택했다. 초연 당시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이겨내고 무대에 올라 찬사를 받았던 초대 엔지니어 김성기와 더블 캐스팅. 이는 영광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사람이 다시 무대에 선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저였다면 다 때려치우고 산 속에 들어가 살았을 거예요. 연기가 어떻고를 떠나 무대에 서 계신 것 자체가 위대한 거죠. 성기 선배님의 하루하루는 그대로 한국 뮤지컬의 역사입니다.”
이렇듯 대단한 선배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이정열은 연습 초반 많이 헷갈렸노라 고백했다. 김성기의 엔지니어를 따라가야 맞는 것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엔지니어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 마음 가는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아마 미국 스텝들이었다면 정해진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라고 주문했을 거예요. 하지만 영국 제작진들은 그에 비해 융통성이 있어서 전체적인 틀을 거스르는 게 아닌 한 배우에게 많은 해석의 여지를 주죠.”
이정열의 프리즘을 거친 엔지니어는 분노와 비애, 비열함과 익살맞음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중심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간적인 짠함’ 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어린 소녀를 거침없이 팔아넘기는 엔지니어에게 환멸을 느낌과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미스 사이공’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예요. 다른 사람이 인정하던 하지 않던 스스로에게 상을 줄 수 있다면 엔지니어는 제 연기 인생의 대상입니다. 연습 기간부터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까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엔지니어로 사는 요즘이 재밌어 죽겠습니다. (웃음)”


- 인터미션 프로젝트 Vol.1


이정열이 90년대 상당히 유명한 포크 가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2002년 4집 앨범을 끝으로 가수 활동을 오래 쉬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뮤지컬 배우로서 이정열의 존재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수 출신 뮤지컬 배우라는 말이 맞긴 한데 사실 공식적인 무대 데뷔는 뮤지컬이 먼저였어요. 1994년 동학 100주년 기념 가극 ‘금강’으로 처음 무대에 섰고 그 다음 해에 김민기 선생님의 록뮤지컬 ‘개똥이’에 출연했죠. 그 때 김민기 선생님께서 ‘한 10년만 뮤지컬 해봐라’ 하셨는데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망쳤어요. (웃음) 그리고 97년에 가수로 데뷔했죠. 요새는 제가 가수였다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으세요. 심지어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가수랑 이름이 똑같다고 말씀하는 분도 계시고요. (웃음) 어쨌건 무대밥을 먹고 사니까 다행스럽고 스스로 좀 기특하고 그럽니다. (웃음)”
가수로도 뮤지컬 배우로도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이정열. 그래서일까? 요즘 트렌드가 되다시피 한 연예인들의 뮤지컬 진출에 대해서도 그는 긍정적이다.
“냉정히 말해서 뮤지컬은 상업적인 투자를 통해 만들어지는 엔터테인먼트예요. 품성이나 실력을 떠나서 제가 제작자라도 표가 팔리는 친구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죠. 또 실력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고요. 그리고 다행히 이지훈이나 예성처럼 저랑 같이 작업했던 친구들은 기본적인 마인드가 된 친구들이었고요. 다만 본인 스스로가 ‘아 뮤지컬이란 게 이런 거구나. 어리바리하게 해서는 욕 바가지로 먹겠다’ 하는 걸 느껴야 되요. 뮤지컬 시장을 새롭게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근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뭔가 불편하긴 하다. (웃음)”
오래 쉬긴 했지만 뮤지컬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가수로서의 작업에 여전한 애착을 갖고 있는 그가 오랜만에 음반을 냈다. 서범석, 박정환, 배해선, 박건형, 박은태, 차지연, 윤형렬등 동료 뮤지컬 배우들을 모아 만든 ‘인터미션(Intermission)’이 그것. 이정열은 기획에 참여한 이들이 평소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를 엮어 만든 이 음반을 통해 뮤지컬 무대에서만 만나던 배우들의 색다른 매력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프로젝트 음반이지만 단발성으로 기획한 것이 아니다. ‘뮤지컬 배우들의 놀이터’를 모토로 사무실을 차리고 매니저까지 자청했다. 오는 11일부터 3일간 대학로에 위치한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에서 콘서트도 갖는다. 뮤지컬 배우들의 콘서트 하면 떠오르는 갈라 콘서트 형식과는 다른 차원의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7,8년 동안 뮤지컬을 하면서 알게 된 혈육 같은 동료들과 ‘우리 기회 되면 음반 하나 내자’ 입버릇처럼 말해왔어요. 그 약속을 이제야 지키는 거죠. 형렬이는 가수로 먼저 출발했고, 은태나 지연이는 3년 동안 작업실에 갇혀서 가수를 준비했던 친구들이고... 음반에 참여한 모두가 노래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들이예요. 이번 음반은 인터미션 프로젝트 볼륨 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멤버나 콘셉트는 바뀔 수 있지만 음반은 꾸준히 낼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뮤지컬 배우들이 음악적인 돌파구를 찾고자 할 때 함께 고민하고 연결해줄 수 있는 다리가 되고 싶어요.”


- 가수? 뮤지컬배우? 나는 나예요.


이정열은 스스로 계획성 있게 살아오지 않았노라 말한다. 외국어대에서 스와힐리어를 전공한 것도, 가수가 된 것도, 뮤지컬 배우가 된 것도 모두 운명이란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움직이게 되요. 난 뭐가 될 거야 이런 건 없었어요. 누군갈 단정하는 것도 누구로부터 단정지어지는 것도 싫어요. 나는 그냥 나예요. 가수나 뮤지컬 배우는 제가 그 때 그때 입는 옷인 거고. 정체성으로 본다면 나는 방랑자? 여행자? 어쩌면 여행 가려고 돈을 버는 건지도 몰라요. 농담이고요. (웃음) 음악인이라는 표현이 맞겠네요. 아! 하나의 원칙은 있어요. ‘재밌게 놀자!’ 라는 거. 뭐를 하던 그것만 있으면 되요. 그리고 거기엔 책임이 따라야 하죠. 잘 놀려면 잘 해야 되니까 최선을 다해야죠.”
자유로운 영혼, 인생의 매뉴얼을 정해놓지 않고 직관에 따라 움직이는 이정열에게도 꼭 이뤄내고 싶은 꿈이 있다.
“쉰 살이 넘으면 대학 교수든 뭐든 제가 가지고 있는 무대에 대한 개념과 마음가짐, 보컬에 대한 테크닉들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에서 일해 보고 싶어요. 소리나 연기를 일러준다는 게 어떤 공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마음을 열고 다가갈 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짜릿한 기쁨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뮤지컬 배우로서는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역할을 꼭 해보고 싶네요. (웃음)


(뮤지컬 ‘미스 사이공’: 9월 12일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 김성기, 이정열, 김보경, 임혜영, 이건명, 마이클 리, 김선영, 김우형 등 출연)
(콘서트 ‘인터미션’: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서범석, 이정열, 배해선, 박정환, 박은태, 차지연 등 출연)


조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