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사태' 어디로 가나?..금감원 내달 1일 재심의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임민희 기자] 키코(KIKO) 부실 판매 문제를 놓고 기업과 은행 간에 벌어진 법적공방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에 가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 따른 환율상승으로 큰 손실을 입은 기업들은 계약 당시 은행들이 환위험 회피에 부적합한 상품을 충분한 설명없이 파는 등 설명의무 및 위험고지 위반을 했다며 각 은행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반면, 은행들은 근거없는 억측이라며 관련의혹을 전면 부인해왔다.
환헤지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는 은행의 키코 부실판매 의혹을 제기, 금감원의 소극적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6월 24일 금감원 앞에서 열린 집회 현장.
2년이 흐른 지난 2월 8일 수산중공업이 우리은행 등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첫 원고패소판결을 내리면서 키코 소송의 승기는 은행 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하지만 관련기업들이 크게 반발하며 항소와 함께 키코 판매 은행과 해당 임직원들을 집단 형사고발하면서 키코 사태는 더욱 격화되는 양상이다.
기업들은 더 나아가 금융당국이 키코 문제를 방조, 은행에 대한 감독․제재를 소홀히 해 사태를 더 키웠다며 지난 24일 규탄집회를 열고 금융감독원을 직무유기로 고발할 뜻을 밝혔다. 금감원은 지난해 9월 외환은행, 한국시티은행 등 키코를 부실 판매한 혐의가 있는 9개 은행에 대한 제재안건을 상정했다가 소송중인 사건이라는 이유로 심의를 유보해 '은행 감싸기' 의혹을 받아왔다. 이런 가운데 금감원이 오는 7월 1일 이 안건을 재상정하기로 함에 따라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키코 사태' 2년간의 진실공방 내막
키코((Knock-In, Knock-Out)는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할 경우 미리 약정한 환율에 약정금액을 팔수 있도록 한 파생금융상품이다. 약정환율과 변동의 상․하한을 정해놓고 환율이 일정 구간 안에서 변동하면 약정환율을 적용받아 차익을 남길 수 있지만 하한 이하로 떨어지면 계약이 무효가 되어 환손실을 입고, 상한이상으로 올라가면 약정액의 2배 이상을 환율로 매입해 은행에 매도해야 한다는 옵션이 붙어 큰 손실을 입게 된다.
키코는 이익 대비 손실액이 큰 상품이지만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한 환헤지 상품이란 이점 때문에 2007년 하반기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07년 말 당시 환율은 달러당 938원으로 한동안 환율하락세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은행의 키코 상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8년 5월 환율이 1040원으로 급등했고 하반기에는 1500원대로 치솟아 키코에 가입했던 대다수 기업들은 수조원대의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기업들은 손해를 보면서 달러를 시장에서 매입해 다시 은행에 팔았고 이는 달러에 대한 수요를 부채질해 원달러 환율가격을 올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특히, 키코에 가입한 기업의 70% 이상은 중소기업으로 일부 기업은 부도를 맞거나 폐업위기에 처하는 등 직격탄을 맞았다. 이에 피해 중소기업들은 '환헤지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발족하고 2008년 11월 3일 은행들을 상대로 불공정한 상품계약임을 주장, 집단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현재 공대위 소속 기업만 180개사가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키코' 피해기업 1천개, 실손액만 수조원
금융감독원이 밝힌 키코 피해기업들의 실현손실액은 지난해 8월말 기준으로 2조9천337억원이다. 공대위에 따르면 250개 기업이 공대위에 가입해 있으나 실제 피해기업은 1천여 개로 추정되고 있으며 가입 기업 중 피해손실 집계가 가능한 기업은 242개다. 피해규모도 환율이 1200원일 때 2조2천400억원, 1300원일 때 2조9천400억원 등으로 환율이 급등할수록 피해액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공대위 측은 "키코가 환헤지 상품이라 볼 수 없는, 은행에만 유리한 불공정한 상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은행들이 키코 상품 판매 시 충분한 설명이나 위험성을 고지하지 않은 것은 물론, 키코상품이 마치 수수료 및 증거금이 필요없고 비용이 들지 않는 '제로 프리미엄' 혹은 '제로 코스트(Zero-Cost)'로 속이고 프리미엄 계산표까지 조작해 수억원의 마진을 챙겼다는 것이다.
또한 은행들이 키코 계약이 풋옵션(팔 권리 매매)과 콜옵션(살 권리 매매)의 프리미엄(가격)이 동일한 제로 코스트 계약의 일종으로 기업들에게 소개, 환율이 계속 하락할 것이라고 단정해 가입을 유도하고 특히 중소기업을 상대로 대출 등을 빌미로 꺾기영업(끼워팔기)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 근거로 은행이 A기업과 키코 계약시 계약서에 첨부한 프리미엄 계산표를 제시했다. 당초 계약서에는 풋옵션과 콜옵션의 프리미엄이 US$7만8천24원이었으나 실제로는 기업이 매수한 풋옵션 프리미엄이 3천897만8천62원이고 매도한 콜옵션 프리미엄이 1억8천887억7만2천110원으로 은행이 1억4천989만4천48원이라는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는 설명이다.
반면 은행 측은 사실과 다르다며 시장위험비용, 신용위험비용, 마진 등의 명목으로 수수료를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공대위는 은행들이 기업의 헤지와는 거리가 먼 사실상 투기상품을 기업에 판매했다며 지난 2월 신한은행, 한국씨티은행, 한국외환은행, SC제일은행 등 4개 은행의 임직원 34명을 사기죄로 고발하고 6월 18일에도 우리은행, 산업은행, 하나은행, 국민은행, 경남은행, JP모건, HSBC 은행 등 7개 은행을 추가고발했다.
공대위는 지난 2월 키코관련 본안소송에서 법원이 기각판결을 내린 데 대해 강력항의하고
은행과 관련 임직원들을 사기혐의로 형사고발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사진제공.
"불공정 계약" VS "충분히 설명"
중소기업중앙회 국제통상실 김태환 부장은 "당시 키코는 판매은행이나 사는 기업들도 정확히 어떤 상품인지 모른 채 단지 수수료가 없는 상품으로 알고 계약한 경우가 많았다"며 "키코는 원달러 환율이 떨어져도 이미 발생한 손실은 줄어들지 않는 반쪽짜리 헤지 상품으로 중소기업들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부장은 "키코에 가입한 기업 가운데 이미 폐업 또는 기업회생신청을 한 회사가 확인된 것만 10여개에 달하는 등 고통을 받고 있지만 은행들은 키코 계약을 정산하지 못한 기업들에게 연체이자율을 15~19%를 적용하고 계약불이행시 신용등급 하락 및 대출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는 등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해 신한은행 관계자는 "프리미엄 계산표 조작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키코든 선물환이든 환율변동에 따라 손실가능성이 있는 계약으로 최소한의 수수료는 있기 마련"이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기업들이 환율 변동 가능성을 고려해 심사숙고해 계약한 것으로 환율이 예상과 달리 너무 올라 피해를 입게 된 것"이라며 "계산표상 차익이 있는 것은 살 때 환율과 팔 때 환율이 4~5% 정도 차이가 있고 수수료 등의 비용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등 관련 은행들은 "현재 소송 중인 건이라 개별 건에 대한 내용이 아니면 언급하기 어렵다"며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기업과 은행 간의 첨예한 대립 속에 지난 2월 키코 본안소송 첫 판결에서 법원이 은행의 손을 들어주면서 향후 항소심과 유사소송 판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공대위 측은 즉각 항소와 은행 및 임직원에 대한 형사고발로 응수, 향후 은행의 잘못된 판매행태와 키코의 계약구조를 밝혀내 판결을 뒤집겠다고 밝혔다.
1심 판결 후폭풍, 금감원의 은행 제재 심의 결과가 변수
공대위 측은 '키코 사태' 피해를 확대시킨 것은 금융당국의 안일한 대응에 있음을 지적하고 조속히 진상조사에 나서지 않을 경우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할 뜻을 밝혔다. 당초 키코 문제가 제기된 것은 2008년 4월, 공대위는 금감원에 은행들의 키코 부실 판매 의혹을 제기하며 조사를 촉구했으나 금감원이 사기업과 은행간의 계약이라는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이진복 의원이 금감원이 제출한 키코 관련 조사내용을 공개하면서 '제재 유보' 논란이 일었다. 금감원은 2008년 8월부터 14개 은행을 점검한 결과 하나․외환․우리․신한․기업․SC제일․한국씨티․대구․산업은행 등 9개 은행이 중소기업의 연간 수출예상액을 초과해 거래계약을 체결하고 거래 기업의 예금인출을 제한한 사실 등 9가지 항목을 적발해 제재심의위원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은행 신인도와 키코 소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은행 측의 요구를 수용해 제재를 1심 판결 뒤로 유보한 바 있다. '은행 편들기' 의혹을 받아왔던 금감원은 7월 1일 이 안건을 재심의할 뜻을 밝혔다.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 관계자는 "은행과 기업간에 소송이 진행 중이라 유보했지만 1심 판결이 난 만큼 이를 다시 논의키로 결정했다"며 "내달 1일 열리는 제제심의위에 키코 부실판매 혐의가 있는 은행들의 제재안건을 올릴 예정이지만 9가지 항목 전반에 대해 다룰 지는 아직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감독소홀 등의 의혹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2년째를 맞고 있는 '키코' 분쟁은 법적분쟁으로 치달으로 장기전이 예고되고 있지만 최근 법원의 본안소송 1심 판결과 금감원의 은행 제제 심의 결과 여부가 상당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