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도 장편소설>이 미친 넘의 사랑…(4)
2007-01-18 홍순도
문호는 공부 얘기가 나오자 갑작스레 자조적인 모습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만만디(慢慢的)라는 말도 슬며시 입에 올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폭력 조직을 잘못 건드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다니요?"
"한번 들어볼래? 하도 어이없는 일이라 창피해서 주위 사람들에겐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요. 진짜 궁금하군요"
황 기자는 무슨 일이 나이답지 않게 순진하고 낙천적이기까지 한 이 선배의 계획을 꼬이게 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문호의 입에 붙박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타이베이의 6월 초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살인적인 무더위를 실감케 해주는 여름의 길목이다. 해마다 이 맘 때면 구질구질한 우기의 장대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고는 한다.
그런 어느 날 오후.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 정리에 여념이 없던 문호는 잠시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4평 남짓 될까 말까 한 단칸 기숙사 방 창문을 통해 내다본 바깥 거리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태양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덥기는 하지만 좋은 날씨였다. 그는 갑자기 시원한 맥주를 한잔 했으면 하는 충동을 느꼈다.
불현듯 그의 뇌리에 한 달여 전 들른 바 있는 친구 정성진(鄭聖鎭)의 단골 맥주 홀인 시먼딩의 완리창청(萬里長城)이 떠올랐다. 술 생각이 간절할 때마다 종종 아련한 기억의 저 편에서 또렷이 되살아나는, 살 떨리는 경험을 하게 만들어준 그 곳이.
학업을 포기하고 1주일 후에 귀국하겠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 문호의 타이완대학의 중국 문학과 박사 과정 동기인 성진은 몹시 취해 있었다. 하기야 그가 그러는 것은 당연할지 몰랐다.
송(宋)대 사(詞) 전공의 문학도인 그로서는 박사 과정을 채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조기 귀국할 결심을 한 것이 못내 아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공부를 포기하는 대신 중국 담당 부장으로 스카웃된 어느 대기업에 며칠 후부터 출근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야, 이 친구야! 좀 작작 마셔"
문호는 불안한 마음에 성진의 맥주 잔을 가만히 나꿔챘다. 성진이 아무 말 없이 히쭉 웃으면서 잔을 빼앗기고 있었다. 더 이상 마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별로 세지 못한 주량이 한계에 왔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성진의 취기는 가만히 놔뒀다가는 언제 제 풀에 쓰러질지 모를 정도로 진짜 위태위태해 보였다. 취해서 그런지 얌전하던 평소와는 달리 옆에 앉은 두명의 호스테스들에게 짖궂은 장난도 계속 걸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둘의 가슴을 연신 주무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스커트까지 걷어올리는 과감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천적으로 색기가 얼굴에 넘쳐보이는 둘의 적극적 태도였다.
마치 성진을 사이에 두고 사랑 싸움을 벌이겠다는 듯 가능한 한 온갖 교태를 다 부리고 있었다. 시간 있을 때마다 기업체의 통역과 번역 일을 많이 해 비교적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그의 경제력과 평소 호탕하기로 유명한 씀씀이를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 했다.
"내 선택이 과연 최선인 걸까, 문호!"
성진이 술기운 탓만은 아닌 것이 분명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는 그러나 그러면서도 프로답게 옆의 두 호스테스의 스커트를 아예 벗겨내려는 노력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둘은 성진이 가슴에 찔러준 미화 20달러 한 장씩에 완전히 저항 본능을 상실한 거미줄 속의 곤충이 돼가고 있었다. 얼마후 어두컴컴한 속에서 둘의 앙증맞은 하얀 속옷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