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속 용산개발..허준영의 '창'이냐 정연주의 '방패'냐?
코레일 사장 VS 삼성물산 사장..용산사업 둘러싼 외나무다리승부
용산역세권개발사업을 둘러싼 허준영 코레일 사장과 정연주 삼성물산 사장의 '기싸움'이 점입가경이다.
경찰청장 재직시절부터 원칙-강경 일변도의 거침없는 불도저식 업무추진으로 이름 높았던 허 사장이 용산사업 투자사 대표였던 삼성물산을 제외하는 초강수를 두며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섰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삼성물산 없이 힘들 것'이라는 세간의 지적에도 허 사장은 꿈쩍도 하지 않은채 오히려 지상최대의 '알박기' 업체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으며 사업권 박탈을 밀어부치고 있다.
허 사장은 정연주 사장 뿐 아니라, 오너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부진 신라호텔 전무까지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싸잡아 추궁했다.
반면 정 사장은 특유의 꼼꼼한 성격답게 섣불리 반발하기 보다는 소리없이 주판알을 퉁기고 있다.
정 사장으로서는 겉으로는 수세에 몰린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느긋하게 판세를 지켜보고 있는 입장이다.
용산개발의 사업성이 불투명한 마당에 일반 시공사로 돌아가건, 현재처럼 주도권을 갖고 사업을 재개하건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도 손해볼 게 없다는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용산사업 대응 '불같은 허준영' '물같은 정연주'
현재 코레일은 삼성물산이 용산역세권개발에서 빠지면서 건설투자자가 9천500억 원에 대해 지급보증을 하고, 3천억 원에 대한 출자사의 증자가 순조롭게 이뤄질 경우 코레일이 4조5천억 원 상당의 랜드마크 빌딩을 선매입하겠다고 폭탄 선언했다.
그러나 삼성물산은 아무런 공식입장을 내놓지 않은채 여론만 주시하고 있다.
코레일과 삼성물산이 이같은 현재 상황은 두 CEO의 상반된 성향이 그대로 반영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허 사장의 경우 지난 2005년 초 경찰청장에 취임하자마자 전임자들이 감히 하지 못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마련, 국내 치안총수로는 처음인 4ㆍ19 묘지 참배 등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겨온 직선적 성격의 소유자다.
경찰 채용의 신체제한 규정이 인권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대해 "머리 나쁜 건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머리 나쁜 사람을 거르는 필기시험도 인권침해냐"라던 당시 허 사장의 직선적 발언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
지난해 코레일 사장 부임 직후에는 1개월 만에 대대적 간부인사를 단행하고 노조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요구에도 '파업은 무조건 불법'이라는 방침을 고수했다. 한마디로 원칙대로의 업무추진 외에는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는 뚝심형이다.
이번 용산사업에서 핵심멤버인 삼성물산을 과감히 배제하고 분노의 타겟을 정 사장이 아닌 이건희 회장과 이부진 전무로 잡은 것도 그의 불도저형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정 사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주판알을 튕기면서 돈을 세는 '계산형' 스타일이다.
사안의 본질을 극한까지 분석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오죽하면 사내에서의 별명이 '미스터Q(Question의 줄임말)'다.
'미다스의 손'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정 사장은 이러한 업무추진 방식으로 삼성엔지니어링 시절인 지난 2003년 3천 원에 불과하던 주가를 올해 12만 원까지 끌어올린 입지전적의 인물이기도 하다.
정 사장의 이러한 성과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회사보다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기 때문이다.
현재 정 사장은 추후 일반 시공사로서 받을 수 있는 사업이득과 다시 용산사업의 주역으로 남을 수 있는 변수 등에 대해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한 상태다.
◆코레일 정면돌파 왜?
31조 원이라는 거대자금이 동원된 용산개발사업의 최대주주는 코레일로 이 사업 시행사인 드림허브의 지분(25%)을 갖고 있다. 반면 삼성물산은 건설투자사 중 지분(6.4%)이 가장 많은 주관사다.
삼성물산이 최대주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업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사업의 인ㆍ허가 등 실질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자산관리위탁회사(AMC)인 용산역세권개발(주)이 바로 삼성물산 계열사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드림허브의 하청 업체다. 드림허브는 의결기구인 이사회만 있는 명목상의 회사이며 개발.계획.분양 등 사업 실질적인 진행은 AMC인 용산역세권개발(주)가 한다. 그나마 의결권이 있는 드림허브 재직이사 10명 중 3명은 삼성물산 임직원이다.
이에 따라 코레일은 다음달 8일 드림허브 임시주총을 열어 AMC 계약해지를 위한 전제조건인 ‘재직이사 5분의 4 동의’ 정관을 3분의 2로 변경할 예정이다.
물론 임시주총에서는 투자자 2/3의 동의만 얻어도 정관변경이 가능하기에 우호지분까지 합해 투자지분 72%가 넘는 코레일이 유리하다.
하지만 임시주총에 앞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선뜻 삼성물산을 대신할 건설사가 없다는 점이 현실적인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미 사업에 참여 중인 SK건설이나 대우건설 대표들도 용산사업이 시작된 2007년과는 달리 상황이 달라져 수익성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레일이 삼성물산을 배제한 후 사업주도권을 쥔다 해도 문제다
예컨대 코레일 발표 대로 4조5천억 원 상당의 랜드마크 빌딩을 매입하면 당초 빌딩 선매입을 약속했던 1조2천억 원에 비해 3조 원 이상 투자금액이 늘어난다.
코레일의 현재 부채는 빌딩 매입금액과 맞먹는 4조5천여억 원대다. 이 때문에 땅값으로 사업비를 충당해 고질적인 기업 적자문제를 용산사업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당초 취지도 무색해짐은 물론 유동성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적자가 나게 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몫이 되는 것이다.
◆삼성물산 사업배제 약일까 독일까?
삼성물산의 경우 아직 어떤 공식입장도 내놓고 있지 않지만 코레일과 달리 선택의 길이 많은 편이다.
현재 드림허브는 건설출자사들에게 총 시공물량 9조원의 20%인 1조8000억원을 지급보증에 관계없이 기본 시공물량으로 배정할 계획이다. 따라서 삼성물산은 현재 지분 6.4%를 보유하고 있으면 일정부분의 시공을 수행할 수는 있다.
또 일각에서는 이미 건설불황 장기화로 용산사업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기에 이대로 철수한다 해도 삼성물산으로서는 큰 손실이 없다.
오히려 지금 손을 떼면 중장기적으로 적자사업에 대한 리스크 요인이 제거됐기에 이익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삼성물산에게도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국내 시공능력 2위업체인 삼성물산이 30조 원대 대형사업을 주도하다가 도중하차하면 그만큼 실추될 이미지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삼성물산 주가는 오름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삼성물산이 잘했다기 보다는 그만큼 용산사업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반대급부적 성격이 짙다”며 “장기적으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외 이미지 하락은 추후 대형 공공사업 수주에도 영향을 끼쳐 ‘수주왕’ 정 사장의 이미지에 먹칠을 할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 사장이 임시주총 전까지 건설사 지급보증액을 줄이는 등 중재안을 제시해 극적 타협을 이룰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즉, 향후 일주일 내 정 사장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용산사업 판도는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