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착한 소시민이 되던가, 자살을 하던가!” 연극 ‘젊음의 열병’
끝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초상화
젊음은 푸르다 못해 겁도 없이 시퍼렇다. 펄펄 들끓는 열정에 빨갛게 타오르기도 한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나 다양하다. 배신의 노랑, 악동의 주황, 미치광이 보라.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는 모험적 사고와 관습을 거부한 반항은 젊음의 특권이다. 본능처럼 쏟아 붓는 의미 없는 일탈이 정당화된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과 희망의 크기는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이 연극의 배경은 1920년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무질서한 사회다. 무질서한 사회에 무질서한 생각을 가진 7명의 의대생은 제멋대로 사랑하고, 제멋대로 미워하며, 제멋대로 상처 받는다. 무엇이 그들을 도발적으로 만드는가. 제대로 다 자라지도 못한 사춘기 청소년들처럼 질풍노도적 행동을 보이는 돌발적인 그들의 모습에서 한번쯤은 현재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나도 지금 여물지 않아 모든 것에 서투른 쓰디쓴 열매라면 차라리 바닥으로 추락해 한없이 익어 주리라.
연극 ‘젊음의 열병’은 독일 페르디난드 브룩크너 작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그의 힘 있는 필체와 무게감은 극을 시종일관 진중하고 힘겹게 이끌어 간다. 젊은이들에게 던져진 가혹한 과제들은 지금의 내 짐인 양 어깨가 뻐근해지기까지 한다. 이 연극은 담담한 듯 하지만 적나라하고 지나치게 외설적이기도 하다. 사랑과 섹스를 구분 못하는 혼란이 막무가내로 표출된다. 고막이 터질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기도 하고 바닥이 부서질 만큼 소품들을 집어던지기도 한다. 젊음은 즉, 난동으로 착각될 만큼 모든 세계를 파괴할 것처럼 비정상으로 행동하는 배우들은 배웠다는 의대생들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다.
총 3막으로 이루어진 이 연극은 러닝타임이 길다. 극은 내내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절대 쉬운 내용은 아니다. 호흡이 길고 사색적인 대사들은 몇 번이고 곱씹어봐야 이해될 정도다. ‘젊음이란 이토록 심오했던가’에 대한 물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배우들은 날카로운 감정의 선에서 배회하는 아슬아슬한 청춘의 묘사를 느끼하지 않게 그려냈다. 연기는 리얼함을 뛰어넘었다. 관객들은 불안함에 몸을 이리저리 비꼰다. 옆집 친구 집에 놀러온 친숙한 느낌의 무대에도 쉽사리 몸을 젖힐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훌렁훌렁 벗는 배우들로 인해 허리가 꼿꼿하게 선다.
전체적으로 극은 지루하게도 느껴진다. 그 이유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아가야 성장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다면 꽤 성공적이다. 온몸에 퍼진 열병은 감기약으로 낫지 않는다. 무수한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용기, 세상에 부딪혀 얻어지는 뜨거운 패기가 세월에 섞여 자연스럽게 버물어 지면 그제야 뜨거운 열병이 옅어진다. 진정한 어른이 되고 성숙해 진다는 것은 아픔을 동반한다. 이것은 진리처럼 굳어져온 신념과도 같다. 성장통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연극 ‘젊은의 열병’은 뾰족하게 날 세웠던 감정이 성장과 함께 마모돼 둥글둥글 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프지 않고 자라지 않을 것인가, 아프고 성숙해 질것인가는 모두 자신의 몫이다. 신랄한 독설 따위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정답이란 없다. 하얀 백지위에 그리는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선택이고 미래다.
뉴스테이지 강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