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피자 논쟁에서 떠 오른 오늘의 우리 언론
재벌은 날로 오만, 언론은 날로 비굴
◆피자 논쟁에 웬 ‘이념’
얼마 전 이마트에서 피자를 대량 판매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재벌 기업이 그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 소규모 동네 피자가게들 다 죽게 됐다’는 주장과 ‘싼 값에 좋은 피자를 소비자들이 먹을 수 있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 논쟁의 골자다.물론 대형마트에서의 피자 판매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쇼핑 온 사람들이 피자를 먹거나 사가는 정도였지, 본격적인 외부 판매를 위해 대량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크기도 더 크고 값도 훨씬 싸니 소비자가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 전 TV에 보도된 이마트 성수점에선 피자 한판 사려면 번호표 받고 최소한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피자판매 문제를 둘러싸고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과 나우콤 문용식 대표 사이에 트위터 상에서 설전도 벌어졌다.
문 대표는 “피자 팔아 동네 피자가게 망하게 하는 것이 대기업 할 일이냐?”며, “이마트 피자로 동네 피자가게를 위협하는 것과 다른 유통업체들이 SSM(기업형 수퍼마켓) 개설해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 부회장은 “(이마트에서의 피자판매는) 정상적인 영업이며 그런 지적은 유통업 전체를 부정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앞서 한 네티즌이 “이렇게 피자를 싸게 팔면 피자가게를 하는 소상인들은 어떡하냐”고 트위터에 비판적인 글을 올린데 대해, 정 부회장은 “다른 음식도 판매되는데 피자만 문제될 게 없고, 오히려 저렴하고 맛있는 피자를 판매하는 게 목표”라며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느냐”고 응수했다. (MBC 보도, 2010.10.29)
정용진 부회장은 문용식 대표가 트위터에서 반말조로 따지고 든데 대해 “이 분 참 분노가 많으시네요”라며 “왼쪽에 서 계셔도 분노는 좀 줄이도록 하세요, 사회가 멍듭니다”라고 답했다. (매일신문, 2010,11.1)
나는 솔직히 이 말에 좀 놀랬다. ‘왼쪽에 서 계셔도 ---’라고 했다는데, 이건 한 마디로 상대방을 좌파(左派)로 규정했다는 얘기 아닌가? 대기업(이마트)을 비판하면 좌파인가? 너무나 재빠른 반격이다. 매우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용진씨는 아직 젊은 기업인이다. 트위터를 열심히 하면서 꽤 유명해졌다. 그래서 한층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런 식의 이른바 ‘이념적’ 대응을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도 어울리지도 않는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에는 싼 값에 큰 피자를 먹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두 시간씩이나 기다려 사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소비자의 권리다.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니 비판 받는 것이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소비자가 싸게 사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모두 선(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계속 싸게 사먹게 되리란 보장도 없다. 물론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가령 모든 소비자들이 대기업이 만든 싼 피자만 먹게 되어서 동네의 군소 피자가게가 완전히 사라져 피자 판매를 독점하게 될 때도 대기업이 지금처럼 싼 값에 계속 팔까? 그때는 가격이고 뭐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대기업이 할 것이 있고 안 할 것이 있다는 얘기다. 싸게 판다고 대기업이 자선사업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 역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하는 사업이다. 자신의 이익이 커질 때 남은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굳이 자유시장 원칙만 내세운다면 우리나라에서 중소 상인들은 설 땅이 없다. 규제 이야기만 나오면 대기업측에서는 규제 보다는 공정경쟁을 통해 소 상공인들이 경쟁력을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자님 말씀이다.
남 생각 안 하고 욕심나는 대로 먹어치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대기업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은 것이다. ‘소비자를 위해서’라는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결국은 자기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자제할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주제를 피자에서 언론으로
이제 주제를 피자에서 언론으로 바꿔보자.
얼핏 연결이 안 되는 주제 같지만, 중앙일보 외에는 대기업과 직접관계가 없는 것 같던 우리 언론계의 구조도 점차 변하고 있다. 미국과 같은 언론의 대형화 체인화 바람이 우리나라에도 솔솔 불어닥칠 조짐이 보이기 때문에 피자를 언론으로 바꿔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지금도 조중동으로 불리는 조선,중앙,동아 등 세 보수 신문은 전국 신문시장의 60%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이 신문들의 전부 또는 일부가 종합편성 PP까지 가지고 언론 유통시장을 한층 장악하는 사태가 올 때 우리나라의 미디어업계는 장차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신문 독자와 방송의 시청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이 신문들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PP설립 자본금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대기업들과 직간접의 연계를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대기업의 광고비에 의지해 경영을 해가는 것이 대부분의 언론의 현실인데, 종편 PP가 시작되면 그 의존도는 더 커질 것이 자명하다. 또한 종편 PP 자본금 조성에 대기업들이 직간접으로 개입되어 있으므로 대기업의 해당 언론사에 대한 영향력도 구체성을 띠게 될 것이다.
언론사 간의 광고 수주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니,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부터 차츰 성역화 되고 있는 대기업의 입김에 언론은 더 기가 눌릴 수 밖에 없다.
◆대기업에 굴복한 언론
“재벌은 날로 오만해지고 있고, 언론은 날로 비굴해지고 있다.” 한 후배 기자가 최근 내게 한 말이다. 사실 언론이 대기업에 굴복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IMF사태를 겪으면서 대기업은 체질을 강화하는 계기를 맞았고 해외경영의 성공 등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언론사들은 불행하게도 2002년 월드컵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이란 광고매출이 매년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기존의 언론사들이 고전을 한데는 케이블, 인터넷 등 뉴미디어에 광고물량을 빼앗긴 탓도 있고 대기업들이 해외 홍보를 강화하면서 국내 광고를 늘리지 않은 것도 요인이었다.
그러면서 대기업 광고 의존도가 큰 우리나라의 신문, 방송은 서서히 대기업과의 관계에 있어서 갑(甲)과 을(乙)의 관계가 되고 말았다. 주종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시혜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시혜를 받은 언론사는 그 기업을 성의껏 선전해 주어야 한다. 기업 홍보성 기사가 늘어난 이유이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대기업 관련 사건이 터지면 이삼일 떠들썩하다가 어느 날부터 관련 기사가 슬며시 사라진다. 사전에 입막음을 못 했다면 사후에 광고를 가지고 입막음을 하는 것이 대기업과 언론의 관행이 되다시피 했다.
기업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언론사에 광고를 주지 않거나 광고량을 줄이는 식의 보복조치를 취하는 일이 이젠 자연스럽다.
‘언론은 사회의 목탁’이라거나 ‘기자는 무관의 제왕’이란 말은 실종된지 오래 됐다. 언론계나 기자들은 더 이상 부끄럽고 낯이 간지러워 차마 쓰지 못하는 옛날 말이다.
최근 소설가 조정래씨가 쓴 <허수아비 춤>이란 책을 보았다. 기업과 언론의 관계를 잘도 그려냈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재벌기업, 비굴하기 짝이 없는 언론과 언론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소설이라지만 거의 논픽션 수준이다. 언론이 지금 그런 신세가 되었다.
◆종편 PP 선정 뒤엔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종합편성 PP가 시작된다는 것은 초대형 언론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신문, 종합방송, 인터넷 등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 미디어의 탄생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광고시장은 요동칠 것이고, 군소 신문, 방송, 지방 언론은 숨이 막힐 것이다. 그 후로 자칫 미국에서 진행되어 온 것처럼 거대 미디어에 의한 인수합병이 진행될 수도 있다. 언론계의 엄청난 지각변동을 예상할 수 있다.
정부가 종합편성 PP 정책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과거 미국에서 미디어 회사에 집단화 체인화를 허용한 논리와 똑 같다. 미국에서는 미디어의 독과점이 진행된 결과 과거에는 도시마다 5-6개씩 있던 신문사가 이제는 거의 ‘1도시 1신문’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나마 신문체인에 합병된 신문들이다.
미디어의 집단화 체인화의 결과는 사주들에게 엄청난 정치적인 힘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거대한 미디어 그룹은 언론 본연의 역할보다는 언론을 이용한 돈벌이에 더 관심을 보였다는 지적이다. <부유한 미디어, 가난한 민주주의>를 쓴 로버트 먹체즈니는 “상업적 언론들이 대세를 이룬 결과 주류 언론은 부유층의 이해에 맞춰 보도하고, ‘자본주의의 즐거움’을 노래하며, 일반인의 일은 무시하고, 월스트리트의 일을 주로 보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벤 바크디키언은 그의 저서 <새로운 미디어 독점>에서 “독과점된 미국의 미디어 상황에서 주류 언론들은 정부의 정책에 잘 따르게 된다”고 분석하면서, “과거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대통령이 연두연설에서 ‘이라크의 대량 살상무기 위협이 임박했다’고 밝힌 뒤부터 미국 언론에서는 국내의 경기침체 등 여러 비판적 기사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종편 PP가 이명박 정부에 우호적인 신문사들을 의식한 정책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종편 PP 선정 뒤에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주목해 볼 일이다.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 이정식 편집고문(청주대 객원교수, 전 CBS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