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록렌즈]이건희 회장은 자식 용병술도 '달인'

2010-12-06     김현준 기자

지난 3일 단행된 삼성그룹 연말 정기 인사에서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과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전무가 나란히 사장으로 승진했다. 두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사람은 이부진 사장이었다.

이 때문에 이건희 회장의 용병술과 후계 구도가 재계의 화젯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자식 용병술이 단연 화제다.

재계와 삼성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회장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 기업을 이끄는 이 회장의 가장 큰 걱정거리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삼성의 지속 가능한 성장 발판 마련이다.

이 걱정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바로 후계 구도로 꼽히고 있다. 현재 흐름과 현상으로 볼 때 이재용 사장이 이 회장의 승계자 위치를 자리매김해 놓고 있다. 이 사장은 매우 합리적이고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변하는 글로벌 사업 환경에서 진돗개처럼 끈질긴 근성과 승부사 기질, 미래를 내다 보는 긴 안목이 좀 더 배양해야 한다는 게 회장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재가 누적돼 있는 삼성그룹의 시스템만 잘 운영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 부족하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부진 사장은 어떤 사람일까? 한 삼성그룹의 핵심 임원의 말을 들어 보자.

"이부진 사장은 3세 경영인 가운데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로 꼽히고 있다. 치밀하며 끈질기고 성격이 매우 강하다. 부하들은 확실하게 장악한다. 그리고 공부를 철저하게 한다. 단기.중기.장기 전략에 매우 능숙하다. 한마디로 말해 이병철 선생을 확실하게 닮았다"

그는 이어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이부진 사장이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이재용 사장이다. 이재용 사장이 호텔신라에 온다고 하면 거의 비상을 걸 정도로 오빠를 두려워한다"

그 정도로 오빠의 위상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튀지 않으려고 노력할 정도로 치밀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이건희 회장이 3세 경영라인을 전면 배치해 사실상 후계자 구도를 구축을 위한 용병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재용 사장을 그룹의 후계자 후보로 선정해 놓고 큰딸을 두 단계 건너뛰어 사장으로 승진시킨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삼성을 이끌 이재용 사장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되고 있다.

양강체제를 기반으로 계열분리를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이 신세계와 현재의 한솔그룹을 이명희 회장과 이인희 고문 등 두 딸에게 계열 분리를 한 것처럼 미리 살림을 갈라 놓기 위한 구도라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이 같은 포석은 태종의 그것과 견줘 보면 재미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왕들이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는 세자를 볼 때, 주로 살펴보는 덕목이 정통성과 능력, 그리고 인품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태조-태종-세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의 왕위세습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인 태조의 눈에 들었던 이는 누구보다 공이 크고 군왕으로서의 면모와 자질을 갖춘 방원(태종)이었다. 하지만 태조는 정에 이끌려 아내인 현비에게서 낳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이 결정은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무시무시한 왕자의 난을 불러오게 된다.

정통성 문제로 능력 없는 형을 왕으로 내세웠다가 결국 왕의 자리에 오른 태종이 처음에 세자로 책봉했던 것은 장자였던 양녕이었다. 태종실록이 편찬된 때가 세종 시절이어서인지 몰라도 양녕의 비행을 강조하고 충녕의 비범함을 돋보이게 하는 등 세자 교체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서술된 면이 있다.

하지만 사실 양녕은 생각보다 크게 부족한 세자가 아니었다. 태종의 세 아들이 모두 그렇듯이 오히려 총명한 편이었고 사냥과 주색을 좋아하긴 했지만 당시 왕들의 행태를 살펴볼 때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양녕보다 충녕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유학에 도통하고 시서예화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신하들의 신망 또한 두터웠다. 능력도 있는데다 성격까지 자신과 비슷한 충녕에게 태종의 관심이 더욱 쏠렸을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태종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양녕을 세자로 두면서 키운다.

양녕의 자질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정통성의 권위가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결국 충녕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충녕은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되는 세종대왕이 된다. 이는 능력과 성품이 뛰어나면 정통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삼성의 이번 인사에서 가장 주목됐던 것은 그동안 계속 후계자의 자리를 지켜왔던 이재용 부사장의 사장승진이 아니라 전무에서 사장으로 두 단계나 뛰어오른 이부진 전무의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90년대 이후 삼성에서 2단계 이상 승진한 경우가 불과 15차례뿐이었기에 이번 승진은 더욱 특별해 보인다.

그는 사장 승진과 더불어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물산 상사부문 고문도 맡게 됐다. 통상적으로 삼성 내에서 고문이라는 직책은 경영 전반에 대한 조언자 역할 정도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장 승진과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이 사장의 삼성물산 경영 참여를 공식화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의 사장으로 임명됐다는 점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이부진 사장의 승진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탁월한 능력이고 다음은 이병철, 이건희로 이어지는 왕의 계보를 잇는 외모와 성격이다.

이 사장의 탁월한 능력은 호텔신라에서의 성과로 입증된 바 있다. 호텔신라는 그가 입사한 2002년 이후 매출이 약 3.5매 신장했으며 연평균 17% 고성장을 거듭해왔다.

2002년 4157억에서 2010년에는 1조 4500억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세전이익 역시 2002년 99억에서 올해 730억으로 7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근래 주력했던 면세점 사업 역시 2004년 12.6%에 불과했던 시장점유율을 지난해 27.8%까지 끌어올렸다. 또 최근에는 롯데면세점을 제치고 루이뷔통 인천공항 신라면세점을 유치하면서 그의 역량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호텔신라에서 이뤄낸 이 같은 성과가 부친인 이건희 회장 신임을 두텁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철-이건희 회장을 똑 닮은 성격 또한 중요 체크요인이다. 매사에 치밀하고 어떤 일에 몰입하면 반드시 승부를 내는 성격은 이 사장을 '리틀 이건희'로 불리게 만들었다. 이 회장이 세 자녀 중 자신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이유로 이 사장을 각별히 아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재계에선 이부진 전무의 두 단계 승진을 삼성의 경영승계 구도와 연결짓는 시각이 많다. 이 회장이 이 전무에게 크게 힘을 실어주면서, 그룹 회장 승계 1순위로 여겨졌던 이재용 부사장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이재용 사장이 e-삼성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을 때부터 나타나 작금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재용 사장이 가지고 있는 에버랜드 지분은 25.1%로 이부진 사장이 갖고 있는 8.37%보다 정확히 3배나 많다. 지분 차이가 크기 때문에 경영권 분쟁 자체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삼성 안팎의 중론이다. 하지만 에버랜드 중심의 계열분리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영권 후계다툼이건 계열분리건 그 선택은 이건희 회장 마음에 달려있다.

삼성가가 이병철 회장 때부터 여성을 경영일선에 참여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그래도 보수적인 영남재벌의 성격상 결국 장자로서의 정통성을 가진 이재용 사장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이 중론이다.

이재용 사장의 '세자'시절은 비교적 길 것 같다. 세자로 오래 보내면서 아버지 태종의 그늘 아래서 만족스러운 세자 노릇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양녕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건희 회장 밑에서 튀지 않고 경영수업을 해 온 이재용 사장과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이부진 사장의 행보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