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故김영갑의 영혼이 스민 제주 오름 기행
한 남자가 죽는 날까지 사랑했던 ‘용눈이오름’을 만나다
봄이 오고야 말았다. 출근길, 스산한 바람에 꽁꽁 싸매고 집을 나서지만 불쑥불쑥 느껴지는 완연한 봄기운에 어느새 여민 옷깃이 스르르 풀어진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겨우내 비축했던 살들과 작별해야 할 때지만 헬스나 수영은 갑갑하고, 산은 높아서 엄두도 못 내고, 걷기는 지루해서 싫다면?
극도로 게으르고 까다로운 당신에게도 안성맞춤인 여행지가 있다. 경비가 조금 들어도 괜찮다면 올 봄, 제주도로 떠나보자. 솔로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신혼부부들이 가득 찬 관광지 아니냐고? 동네 한 바퀴 돌기도 귀찮은 데 ‘올레길’을 걸으라는 무슨 소리냐고? 자자, 그냥 군소리는 잠시 접어두고 따라오시라.
섬의 중심에 있는 한라산 주변 산복에 분포한 360여개의 기생화산, 오름. 그중에서도 단연 ‘용눈이오름’이 으뜸이다.
故김영갑 씨의 사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용눈이오름’.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누워있는 여성의 육감적인 몸매와 닮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어릴 적 엄마 품에 안겼을 때의 안락함이 느낄 수 있다. 굴곡진 언덕을 오르내리며 넘실거리는 봄기운을 만끽하다보면 흐르는 시간이 야속할 지경이라고.
이곳에서 우뚝이 솟아있는 ‘다랑쉬오름’, 야트막한 ‘아끈다랑쉬오름’, 특이한 외형이 눈길을 끄는 ‘손지오름’ 등을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오름의 가장 큰 매력은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는 점이다. 회색빛 시멘트로 도로를 깔끔하게 닦아놓고, 온갖 상점과 식당으로 난잡해진 유명 관광지와 달리 오름은 섬만이 가진 평화로움과 쓸쓸함을 선물한다.
끊임없이 발길을 붙잡는 오름의 마력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쩔쩔매던 중, 무릎을 탁 칠만한 글귀를 발견했다.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그곳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 문구의 의미를 알 수 있으리라. 풋풋한 봄기운을 들이 쉬며 오름에 올랐을 때 느끼는 황홀경이란! 지나간 연인의 품이 한없이 그립다면, 가슴 속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다면 故김영갑이 죽는 날까지 사랑했던 그곳을 한 번 찾아가 보자.[소비자가 만드는 신문=김솔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