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이 퍼뜨린 '그놈 바이러스'

2007-06-12     헤럴드경제제공

‘그놈’이 난무한다. 사전에 따르면 ‘그놈’이란 ‘듣는 이에게 가까이 있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남자를 비속하게 낮춰 부르는 3인칭 대명사’다.


거친 것이 친숙해지고 아픈 것이 당연해진 세상. 그놈의 술, 그놈의 사랑, 그놈의 돈…. ‘그놈의 그놈’은 이제 손쉬운 수식이자 일종의 말버릇이 됐다.


귀여니의 인터넷 연재소설 ‘그놈은 멋있었다’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애정표현으로까지 격상됐다. ‘그놈은 멋있었다’는 참여정부 출범과 때맞춰 인기를 얻었다. ‘그놈’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질감과 ‘멋있었다’라는 술어가 부여한 어긋남은 한편으론 신선했다. 게다가 그놈으로 나온 송승헌의 잘생긴 얼굴은 ‘그놈’의 이미지를 한껏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인기와 함께 비속어로 시작하는 제목에 대한 거부감은 호감으로 뒤바뀌었다.


이후 그놈을 앞세운 제목들이 줄을 이었다.


‘그놈의 결혼식’이란 가요부터 영화 ‘그놈 목소리’, 연극 ‘그놈, 그년을 만나다’까지…. 심지어 요리책에도 ‘그놈의 부엌에서 찾은 건강 밥상 120가지’란 제목이 붙었다. 제목들이 충분히 익숙해지면서 ‘그놈’이란 단어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일상화된 탓일까. 급기야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도 스스럼없이 나왔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대운하 공약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며 “그런데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라고 했다.


아무리 그놈이 일상화된 비속어라 해도 그놈의 헌법에 이르러서는 뜨악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취임 때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엄숙하게 선서한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헌법에 대한 ‘비하’ ‘능멸’이라는 논란이 이는 이유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놈’이란 비속어가 자주 쓰이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서 제도적이고 공식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중의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헌법에 대해 썼다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며 “헌법은 사회에서 지고지순한 지위에 있는 것인데 대통령이 앞장서서 헌법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초헌법적인 지위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볼수 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그놈’도 문맥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는 있다.


2005년 손석희 교수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희망했다”는 아소 일본 외상의 발언에 일침을 놓았다. 그는 당시 “도대체 우리들은 언제까지 이런 자의 헛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요? 여기서 자(者)는 놈자”라고 꼬집었다.


비속어가 평상어처럼 쓰이는 것은 바로 일상이 얼마나 비속해졌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단어가 공공연히 오르내리는 것 역시 탈권위가 아니라 사회의 천박함을 상징한다. 그놈이란 단어에 담겨 있는 상대방에 대한 조롱과 야유도 툭하면 남을 업신여기고 적개심을 표출하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은 듯 하다.


정신은 말을 규정하고 말은 정신을 비춘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사고 수준과 인격까지 짐작케한다. 그래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했던가.


‘내일 그 사람 결혼을 합니다’로 시작하는 가수 김현정의 노래 ‘그놈의 결혼식’에서처럼 미움을 받은 ‘그님’은 ‘그놈’으로 돌변한다. ‘놈’과 ‘님’의 사이는 모음 한자의 거리만큼 가깝다. 그래도 모음 한자 거리의 존중과 구별은 아직은 필요한 때다.


윤정현ㆍ하남현 기자(hit@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