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택 박병엽 부회장, 그의 사의가 안타까운 이유

2011-12-07     유성용 기자

"지난 5년간 워크아웃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이달 말까지 근무하고 일선에서 물러나겠다."

29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겁 없이 휴대폰 제조기업 팬택을 창업한 박병엽 부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팬택을 가장 모범적인 워크아웃 졸업 사례로 만들고 화룡점정의 순간에 갑자기 하산을 선언해 충격을 주고 있다. 

2006년 국내 금융환경 악화로 팬택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자 자신의 지분 4천억원을 회생자금으로 내놓고 전국 방방곡곡의 채권단을 설득하며 백의종군한 그였기에 갑작스런 사의를 둘러싼 논란이 예상 된다.

실제로 최근 채권단 내부에서는 일부 채권은행이 담보 문제로 박 부회장과 갈등을 빚으며 난기류를 형성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재계는 한국기업사에서 박 부회장이 갖는 기업가로서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박 부회장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에 지, 덕, 용의 세 가지 리더십 면모를 두루 갖춘 경영자라는 것.

사즉생의 정신으로 최근 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팬택의 기업개선작업을 진두지휘한 박 부회장은 스마트폰 올인 선언 이후 17분기 연속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워크아웃 졸업 후 새로운 50년을 꿈꿀 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한 셈이다.

팬택이 창업 10년 만에 매출 1조원을 넘기는 등 성공신화를 쓴 데는 "변화의 순간에 늘 위기가 따르며 그 위기를 기회로 삼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박 부회장의 신념이 크게 작용했다.


창업 후 일명 삐삐라는 무선호출기사업에서 시작해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 팬택은 90년대 후반  국내 대기업들이 주름잡고 있던 모바일 휴대폰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런 와중에 박 부회장은 사재를 털어 현대전자에서 분사한 현대큐리텔을 2001년말 인수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4년 뒤인 2005년에는 국내 최고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스카이를 인수해 휴대폰 사업의 절정을 구가하게 된다.

이후 유동성 위기로 추락했지만 기업개선작업 와중에도 박 부회장은 다시 한 번 변신을 꾀했다. 2009년 말 전 세계적으로 스마트폰 열풍이 일자  박부회장은 그 파괴력을 직감하고 스마트폰  올인을 선언했다. 당시 대세는 여전히 일반 폰이었고, 국내의 모든 사업자가 스마트폰에 대한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또 한번의 결단이었다.

팬택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팬택 연구소를 비롯한 대다수 임원들이 스마트폰 올인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박부회장의 예감은 적중해 팬택은 스마트폰 시장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매출도 가파른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작년 2조1천억원이던 매출은 올해 1조원이 늘어난 3조2천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2010년은 팬택과 박 부회장에게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됐다. 국내 최초로 안드로이드OS 스마트폰을 출시했고 그해 누적 판매량 400만대 판매를 돌파하며 굴지의 대기업 LG전자를 제치고  스마트폰 시장 2위를 차지했다.

팬택 재무본부의 시금석이 되고 있는 유명한 일화를 통해 박 부회장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다.

현대큐리텔을 인수한 박 부회장은 업무보고 과정에서 금융권과의 이자 협상율을 5.2%라고 보고한 재무책임자에게 "5.2%가 아니라 5.195%"라고 지적하며 소수점 셋째짜리까지 따져볼 줄 아는 철저함을 지시했다고 한다.

시작부터 대기업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휴대폰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박 부회장의 가장 큰 무기는 열정이었다. 유럽과 미국을 이웃나라처럼 무박 3일의 일정으로 다녔을 정도다.

게다가 박 부회장은 사업상이든 아니든 처음 대면한 사람과 5분 이면 호형호제 할 수 있는 친화력을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팬택 관계자는 "박 부회장이 때때로 회사 사무실을 순회하면서 일일이 마주치는 수십 수백명 직원들 이름을 직접 호명하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등 특유의  친화력으로  팬택 전 임직원을  똘똘 뭉치게 만들어 어려운 난관을 이겨내게 했다"고 말했다.

[마이경제 뉴스팀/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유성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