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투기자의 '촌지실록'<12> 탄광지역 '새마을 출장'

2007-07-31     정리=김영인 기자
    김봉투 기자가 항상 호화판 '지방취재'를 즐긴 것만은 아니다. 이른바 '새마을 출장'도 있었다. 1980년대 초, 군사정권의 눈초리가 살벌할 때였다.

    군사정권 덕분에 '무관의 제왕'들은 스타일을 구기고 있었다. 모두들 풀이 죽어 있었다. 당시의 '언론 통폐합'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보다는 춥고, 배가 고팠다. 술도 마려웠다. '낑'이라는 것이 완전히 말라붙었기 때문이다. '낑'이 없으니 소주를 마시기도 벅찼다. '낑'이 간절하게 그리워지고 있었다. 군사정권 초기에는 그랬다.

    이런 와중에 난데없이 출장을 갈 기회가 생겼다. 강원도 탄광지역을 '1박 2일'로 취재하는 출장이었다. 김봉투 기자 일행은 '고속버스' 편으로 강원도까지 굴러갔다. 관광버스도 아닌 고속버스였으니 굴러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속버스 차표를 끊은 기자는 없었다. 고속버스 값까지 개인부담을 시켰으면, 아마도 출장을 포기했을 것이다.

    탄광지역에 도착하자 먼저 여장부터 끌렀다. 조그만 '호텔'이었다. 그러나 시설은 빈약했다. 이름만 호텔인 '장급' 비슷한 여관이었다. 그나마 '2인 1실'이었다. '무관의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동료기자와 객실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데 간사가 문을 두드렸다. 간사는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하얀 봉투 두 장을 내던졌다. '낑'이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낑'이었다. 반가웠다. 하지만 동료 기자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새마을 출장에 무슨 '낑'까지 주고 그러나."

    봉투 속에는 '일금 7만 원'이 들어 있었다. 시시했다. 당시 김봉투 기자의 월급이 30만 원을 밑돌 때였으니 '일금 7만 원'이면 적지는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월급보다도 많은 '낑'에 익숙해진 김봉투 기자 일행은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들을 지었다. 그래도 때가 때이니 만큼 그 정도나마 마련한 것이 신통했다. '낑'을 마련하려고 애를 먹었을 것이 분명했다.

    곧 이어 광부들이 석탄 캐는 현장을 견학했다. 견학도 취재였다. 막장 입구에서는 겁부터 먹었다. 안전사고 예방에 관한 강의인지, 잔소리인지를 한참 들어야 했다. 사고 위험이 있다며 라이터를 압수 당했다. 덤으로 담배까지 압수 당해야 했다.

    막장에서는 허리를 구부려야 했다. 고개를 들면 헬멧을 쓴 머리가 천장에 닿았다. 지하 수백 미터나 되는 곳이었다. 막장 안은 무덥기도 했다. 막장을 한바퀴 돌아보는 잠깐 동안의 견학인데도 모두들 진땀을 흘리고, 허덕거렸다. 게다가 시커먼 물이 천장에서 뚝뚝 떨어졌다. 무너지지나 않을까 겁을 먹어야 했다.

    견학을 마치고 나와 샤워를 하니 목구멍에서 '시커먼 가래'가 쏟아져 나왔다. 콧구멍이 근질근질했다. 코를 푸니 콧물도 시커먼 색깔이었다.

    탄광 측에서는 샤워를 마친 기자들에게 돼지비계부터 먹였다. 그래야 몸 속에 들어간 석탄가루를 훑어 내릴 수 있다고 했다. 돼지비계를 싫어하는 기자도 허겁지겁 먹었다. 안 먹었다가는 진폐증이라도 걸릴 것 같은 강박관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도 도시락을 까먹는 광부들이 있었다. 까만 막장 속에서 까만 얼굴들을 하고, 하얀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진폐증을 먹고살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이 우리나라에서 환경이 가장 좋은 막장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무관의 제왕'을 환경이 부실한 막장으로 모실 수는 없는 것이다.

    저녁식사 겸 음주가 시작되었다. 호텔만큼이나 내키지 않는 음식점이었다. 그런 음식점에서도 '파트너'가 몇 명 합석했다. 양주병까지 나왔다. 겁을 잔뜩 먹었던 기자들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돌았다.

    기자 하나가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 때 김봉투 기자와 같은 객실을 쓰기로 되어 있던 기자가 재빨리 '낑' 봉투를 꺼내서 한 '파트너'에게 내밀었다.

    "너, 이 돈 줄 테니 지금 화장실 간 그 친구, 오늘밤에 모셔라. 잘 모시지 않으면 혼날 줄 알구. 그 친구는 통이 크니까, 잘만 모시면 더 줄지도 몰라."

    '파트너'는 입이 벌어졌다. 당시의 탄광지역에서는 아마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을 것이다. '파트너'는 화장실에서 막 나오는 기자 옆에 바짝 붙으며 웃고, 말을 걸고, 아양을 떨었다. 기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야말로 '헬렐레'였다.

    이튿날 '고속버스' 편으로 돌아오면서 그 기자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그 파트너가 나한테 반한 것 같아. 그렇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그렇게 잘 해줄 수가 없었을 거야.…"

    고속버스가 웃음소리로 한바탕 들썩거렸다. 그 기자는 이후에도 사연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파트너의 '몸값'은 기자의 '새마을 낑'값이었다.

    이것이 소위 '새마을 출장'이었다. 군사정권에 눌려서 기사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했던 기자들이었다. 그런 기자들이 출장만큼은 찾아먹은 것이다. 부끄러운 출장이었다.

    군사정권은 당시 모든 '낑'을 봉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독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는 매달 '낑'을 지급했다고 한다. 그 금액이 '새마을 출장'과 같은 7만 원이었다. 그래서 '새마을 출장' 때 받은 '낑'의 규모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낑'을 받고 나서, 받은 티를 내는 기자는 없다. 하물며 얼마를 받았다고 '이실직고'하는 기자는 더욱 없다. 그러니 7만 원 운운한 것은 전해들은 얘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