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투기자의 '촌지실록'<15> 길바닥에 '돈 뿌리는' 기자

2007-07-31     정리=김영인 기자
    신문기자는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것이 직업이기도 하다. '사건현장'을 취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장을 쫓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을 쫓아다니기 위해서는 교통비다, 뭐다 해서 길바닥에 돈을 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현장을 찾아가 '발로 쓴' 기사가 아니면 기사의 가치가 떨어진다. '작문' 취급당한다. 생생한 기사를 쓰려면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특히 그렇다. 경찰서 출입기자들은 꼭두새벽부터 움직여야 한다. 보통사람들은 곤하게 잠을 자고 있을 시간에도 어두운 거리를 싸돌아다녀야 한다. 캄캄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기자들은 어떻게 보면 몽유병 환자들이다.

    김봉투 기자도 그런 시절을 거쳤다. 세수도 하지 못한 채, 새벽부터 담당구역 안에 있는 경찰서 5∼6곳을 돌면서 사건을 체크했다. 담당구역 내에 있는 큰 병원도 빠뜨리지 않고 돌아다녀야 했다. 이를 속된 말로 '마와리'라고 한다. 일본말이다.

    보통사람들이 출근하고 있을 시간에 '마와리'를 일단 끝내고 간단하게 세수를 한 뒤, 아침식사를 한다. 그리고 다시 '마와리'를 시작한다. 물론 피곤하면 슬그머니 엎어져서 잠을 자기도 한다.

    이처럼 담당구역을 하루종일 뱅글뱅글 돌아다니는 것이 경찰 출입기자의 일과다. 사건이라도 터지면 밤낮도 없이 뛰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마와리'를 하고도 기사를 놓치면 기자생활을 하고픈 마음이 사라지곤 한다.

    '마와리'를 하려면 당연히 돈이 들어간다. 걸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문사에 취재차량이 있기는 하지만, 모자란다. 다른 기자들과 번갈아 이용해야 한다. 취재차량이 없으면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며 '마와리'를 해야 한다. 그러니 길바닥에 돈을 뿌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신문사에서는 그래서 취재기자들에게 취재비를 지급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부족한 것이 취재비다.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싸돌아다니다 보면 교통비를 하기에도 모자란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하면서 하루 세끼 밥을 바깥에서 챙겨먹으려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경찰서 출입을 끝내고 다른 곳을 출입해도 큰 차이는 없다. 취재비는 쥐꼬리나 오징어다리처럼 항상 얇다.

    김봉투 기자가 과천 정부청사를 출입할 때다. 당시 과천 청사 출입기자들은 신문사로 출근하지 않고 곧바로 과천으로 출근했다. 신문사에 출근했다가 과천으로 가려면 반나절이 그대로 허비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다. 지금처럼 지하철도 다니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아예 과천으로 출근해서 취재를 마친 뒤 신문사는 오후에 출근했다.

    김봉투 기자는 과천 청사를 출입하면서 '과천 수당' 비슷한 이름으로 취재비를 지급 받았다. 그러나 그 수당이라는 것이 너무 빈약했다. 중고 승용차에 기름 몇 번 넣고 나면 바닥나고 마는 수당이었다. 집에서 과천으로 출근했다가 신문사로 다시 출근한 뒤 기사를 쓰고 퇴근하려면 하루 80km 정도를 매일같이 운전해야 했다.

    다른 신문사도 대충 비슷했다. 신문사마다 수당 차이가 조금씩 났지만, 취재비를 풍족하게 지급하는 신문사는 거의 없었다. 그랬으니 과천 출입기자들은 주머니사정이 신통치 못한 편이었다. 신통치 못한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낑'이었다.

    어느 날에도 김봉투 기자는 고물 승용차를 털털거리며 과천 기자실에 도착했다. 경쟁 신문사의 고참 기자 두 명이 머리를 맞대고 '구수 회의'를 하고 있었다. 고참 기자들은 김봉투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의미 있는 눈웃음을 보냈다. 이른바 썩은 미소라고 하는는 '썩소'였다. 마치 '역적 모의'라도 하다가 들킨 듯한 표정이었다.

    그 눈웃음의 의미를 이틀쯤 지나서 알 수 있었다. 기자실의 '복지상태'가 극히 불량해서 기름값 걱정을 해야할 정도가 되었으니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쉽게 표현하면, '벼락치기 출장'이라도 한번 다녀와서 '낑'을 챙기자는 '썩소'였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낑'이라는 것을 만져본지 대충 석 달은 지난 것 같았다. 머나먼 과천까지 출근하면서 기사를 취재해 열심히 써주고 있는데도 관리들이 기자들의 노고를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기자들이 기사를 써주지 않으면 관리들은 자기들의 일을 국민에게 알릴 방법이 없다. 그러면 무능한 관리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따라서 관리들은 기자들의 '복지상태'를 수시로 점검해서 '낑'이 모자라면 채워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기자들이 돈 걱정 없이 안심하고 기사를 쓰고, 관리들은 국민에게 점수를 딸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관리들이 기자에게 '낑'을 주는 것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참 기자들은 이런 '해괴한' 궤변을 동원, '벼락치기 출장'을 밀어붙였다. 대변인에게 기자들의 어려움을 납득시켰다. 술이나 한잔 마시고, 기름값 정도에 불과한 '낑'을 챙기는 아주 '건전한' 출장을 가기로 했다. 장소는 대전이었고, 명분은 '기자단 초청 간담회'였다. 김봉투 기자는 이 출장에서 하마터면 엄청난 기사를 쓸 뻔한 '대단한 사건'을 겪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