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투기자의'촌지실록'<16>10만원권 화폐 현실화…'슈킹'쉬워(?)

'007가방'에 7억원 거뜬 '추적' 위험 걱정마!

2007-07-31     정리=김영인 기자
    과천 기자실의 출장은 대전의 기업 한 군데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기자들은 기업의 현황과 지역경제에 관한 브리핑을 흐리멍덩한 태도로 듣고, 곧바로 흘렸다. 한두 번 다녀본 출장이 아니어서 그런 일에는 이미 도가 튼 기자들이었다.

    그리고 나서 조폐공사를 방문했다. 조폐공사 사장과 차 한잔을 마시며 간단한 '간담회'를 가졌다. 그러면 뭔가를 내놓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터졌다. 조폐공사 사장이 기자들에게 "조폐공사의 경영이 무척 어렵다"고 호소한 것이다. 조폐공사는 돈을 찍어내는 곳이지만, 지금은 '우표'를 찍어서 간신히 적자를 메우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조폐공사의 경영난을 타개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방법은 '새 돈'을 찍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화폐개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고액권'을 발행하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경제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고액권'을 발행할 때도 되었을 뿐 아니라, 조폐공사의 고질적인 경영난을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조폐공사 사장은 이미 5만 원 짜리 지폐와, 10만 원 짜리 지폐 등 2가지 새 화폐의 '샘플'을 제작해서 청와대 등에 보냈다고 밝혔다. 그러니 "기자 여러분이 대대적으로 보도해서 어려운 조폐공사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기자들은 긴장했다. 엄청난 뉴스였던 것이다. 곧바로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기사를 불러야 할 '빅 뉴스'였다. 경제와 사회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을 사건이었다. 고액권을 찍는다고 하면, 국민의 이른바 환물(換物) 심리를 자극해서 엄청난 땅 투기, 주식 투기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출장이고, '낑'이고 모두 포기하고 기사에 매달려야 할 긴급한 상황이었다. 198x년의 일이었다.

    기자들은 긴장했지만, 동행했던 대변인은 당황했다. 기사가 터져 나가면 야단이 날 사건이었다. 더구나 '고액권 발행'은 조폐공사 사장 정도가 발표할 성격의 기사도 아니었다. 적어도 경제부총리나 재무부장관쯤 되는 거물이 발표할 성격의 기사였다. 어쨌든, 기자들이 기사를 송고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기자들에게 듣지 않은 일로 해달라고 매달렸다.

    이어 술판이 벌어졌지만 대변인은 좌불안석이었다. 술을 마시던 기자가 화장실을 가도, 어디 가는가 캐물었다. 화장실에서 시간을 오래 끌면 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혹시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기사를 불러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변인은 기자들의 습성을 꿰뚫고 있었다.

    술판이 끝나고, 기자들이 숙소에 들었을 때에도 대변인은 안심할 수 없었다. 기자들이 묵고 있는 방을 일일이 3∼4 차례씩 노크했다. 대변인의 입장도 난처해지겠지만, 동료 기자들을 물 먹이고 혼자만 기사를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기자들에게는 '특종심리'라는 것이 있다. 엄청난 뉴스라면 누구나 기사를 쓰고 싶어진다. 그것도 혼자서만 쓰고 싶어진다. 아무도 안 쓰고 혼자서만 써야 '특종'이 된다. 기자들에게는 또한 '낙종'을 하지 않으려는 심리도 있다. 누군가가 밤에 몰래 신문사로 기사를 불러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래서 기자들 역시 불안했다. 잠자는 사이에 누군가가 기사를 쓰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다행히(?) 기사를 보낸 기자는 없었다. 기사와 '낑'을 바꿔먹은 셈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사와 바꿀 정도로 '낑'이 많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그 날 밤 대변인은 아마도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소위 '007 가방'에 1만 원 짜리 빳빳한 돈을 차곡차곡 채우면 모두 7,000만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조폐공사 사장이 고액권을 찍자던 당시, 7,000만 원이면 서울의 상당히 넓적한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았다. 7,000만 원은 대단히 큰돈이었다.

    게다가 '007 가방'을 가득 채운 돈은 무게도 약 11kg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체격의 어른이 별로 무거움을 느끼지 않고 들고 다닐 수 있는 무게다. 아파트 한 채가 넘는 돈을 어렵지 않게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7,000만 원은 그렇게 큰돈이 못된다. 아파트 한 채는커녕 전세값을 하기에도 부족한 돈이다. 참여정부 들어 집값이 대단히 많이 오르는 바람에 더욱 작은 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웬만한 월급쟁이의 연봉을 훨씬 넘는다.

    '007 가방'에 가득 담긴 7,000만 원이 만약에 뇌물이라면 어떨까. 과거에는 아파트 한 채 값보다도 많은 거액의 뇌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뇌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아파트 한 채에 해당하는 뇌물을 받으려면 적어도 10배의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007 가방' 하나면 충분했던 뇌물이 라면상자, 사과궤짝으로 대형화되더니, 마침내 '차떼기'라는 것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수표가 있기는 하다. 돈 대신 '거액 수표' 한 장을 받는다면 '차떼기'를 할 필요도 없어진다. 하지만 '거액 수표'는 불안하다. '추적'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찮지만 현찰을 챙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10만 원 짜리 돈이 지금 현실화되고 있다. 정부가 고액권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미 10만 원 짜리 자기앞수표가 현찰 행세를 하고 있고, 수표 발행비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고액권을 발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다. 게다가 경제규모가 그 동안 무척 비대해지는 바람에 고액권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상당수 국민이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낑'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처럼 '007 가방' 하나면 충분한 시절로 되돌아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10만 원 짜리 돈이 나오면 '007 가방' 하나에 7억 원을 거뜬하게 담을 수 있다. 화폐의 크기가 줄어들기라도 하면 더 많이 담을 수도 있다. 그러면 '차떼기'를 할 필요도 없어진다. '007 가방' 하나만 채우면 다시 아파트 한 채 값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불법자금의 추적이 어려워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0만 원 짜리 돈이 발행된다면 김봉투 기자가 받는 봉투의 부피도 얄팍해질 것이 분명하다. 같은 규모의 '낑'을 받고도 부피가 적다면, '슈킹'이 얼마나 쉬워질까. 어쩌면 익숙하지 않은 부피라고 툴툴거리며, 부피를 예전처럼 두툼하게 해달라고 우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낑'의 덩어리도 따라서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럽이 화폐를 '통일'하기 전, 이탈리아 사람들은 10만 리라 짜리 돈을 사용했다. 우리 돈으로 5만 원 가치다. 그들은 물건을 사고 10만 리라 짜리 고액권을 내면, 꼭 밝은 불에 비춰보곤 했다. 혹시 가짜 돈이 아닐까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부가 대비책을 만들겠지만, 우리도 곧 그런 희한한 현상을 접하게될 것 같다.

    제임스 스코트라는 서양 사람은 '제 3세계'에서 부패가 횡행하는 이유를 다음 6가지로 분류했다. ① 선물을 주고받는 전통이 강하다. ② 인맥·학맥·혼맥 등 인간 관계의 유대를 지나치게 중시한다. ③ 뇌물보다 더 큰 반대급부를 정부로부터 받아낼 수 있다. ④ 각종 사업에 정부의 간섭이 지나치게 많다. ⑤ 사회의 다른 분야에 비해 관료조직의 힘이 너무 크다. ⑥ 공무원들의 신분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농부들의 존경을 받는다. <뇌물의 역사, 존 T 누난, 이순영 옮김>

    우리나라의 경우 과연 몇 개 항목에 해당될까. '제 3세계' 국가가 아니라, 이미 선진국 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기 때문에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분류라고 할 수 있을까.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검은 돈 이야기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