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투기자 '촌지실록'<39>'물좋은' 기자실 '나쁜' 기자실
2007-07-31 정리=김영인 기자
간사는 기자실에 남아 있던 경비가 얼마였는데, 이번에 얼마가 걷혀서 모두 얼마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몇몇 기자들이 "간사, 수고했다"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어 기자들에게 '추석 낑'을 분배했다. 그 방법이 희한했다.
"xx신문, 몇 명이지?"
"어, 우리 3명."
그러면 간사는 '수표책'에서 수표 9장을 쭉 찢어서 xx신문 '1진'에게 전달했다.
"xx일보, 몇 명이지?"
"어, 우리도 3명."
그러면 간사는 수표책에서 또 수표 9장을 쭉 찢어서 xx일보 '1진'에게 전달했다. 1인당 10만 원짜리 수표 3장씩을 '낑'으로 나눠준 것이다. 당시로서는 제법 상당한 규모의 '낑'이었다. 국회 기자실에서는 기자들에게 '낑'을 이런 식으로 분배하기도 했다.
경찰서나, 국회 등 큰 출입처에는 기자들이 여러 명 출입한다. 가장 고참 기자를 1진, 중간 고참 기자를 2진, 피라미 기자를 3진이라고 부른다. 1진을 특별히 '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캡틴의 줄인 말일 것이다.
경찰서 출입기자는 당시의 시경 출입기자를 '캡'이라고 불렀다. 3진인 피라미 기자는 출입처를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다가 2진에게 취재 내용을 보고하거나, 취재 지시를 받는다. 2진은 1진에게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는다.
국회의 경우, 한 신문사에서 1, 2, 3진 등 여러 명의 출입기자가 출입했다. 물론 신문사마다 출입기자의 숫자는 조금씩 차이가 났다. 출입기자 숫자가 많다보니 '총회'를 한 번 열면 넓은 기자실이 메어질 정도로 붐볐다.
'낑'을 이처럼 사이좋게(?) 나눠준 국회 기자실은 '좋은 기자실'이었다. 분배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기자실이 더러 있었다. 간사가 '낑'을 자기 멋대로 차별해서 분배하거나, 또는 '독식'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속칭 '배달 사고'라고 했다. 신문지 배달 사고가 아니라, '낑' 배달 사고다.
이런 기자실에서는 기자들 간에 '삿대질'이 가끔 벌어졌다. 기사는 물먹어도, '낑'만큼은 물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낑' 분배를 둘러싸고 얼굴을 붉혀가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지저분한 돈 싸움질이었다.
198x년 5월의 어느 날 노동부 기자실에서 5∼6명의 기자가 모여 '구수 회의'를 했다. 그 표정들이 살벌했다. 간사가 대기업을 돌아다니며 '낑'을 '수금' 해서 꿀꺽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모인 기자들은 단호했다. 간사를 제명하든지, 바꿔버리기로 했다. 반대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우선, 간사를 불러서 해명을 듣기로 했다.
기자실이란 곳은 묘했다. 가입이 있다면 탈퇴도 있을 만한데 정작 탈퇴하는 기자는 없었다. 먹을 '낑'이 많은데 탈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자실에 가입하려고 애를 썼다. 그랬으니 기자실 탈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오직 제명이 있을 뿐이었다.
기자들이 간사의 징계를 결의하는 과정에서 일이 커지고 말았다. 이 '독식 사건'을 어느 신문이 손바닥만큼 크게 보도해버린 것이다. 기자실은 물론이고 노동부 전체가 벌집이 되고 말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기자실 간사가 국제노동기구 총회 취재를 앞두고 대기업을 돌아다니며 거마비 명목으로 '낑'을 거뒀다. 그랬다면 정확한 금액을 공개하고 기자들 머릿수로 나눠 공평하게 분배해야 했다. 하지만 간사는 극히 일부의 '낑'만 기자들에게 나눠줬다. 나머지 대부분을 슬그머니 챙겼던 것이다.
기자는 눈치가 빠르다. 눈치 없는 기자는 기자생활을 하기 어렵다. 더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낑' 문제였다. '낑' 문제에 관한 한 기자들의 코는 사냥개보다도 예민할 수 있다. 결국 간사는 출입기자들에게 공개사과하고 간사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 간사는 더 이상 '독식'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환경부가 환경처였던 198x년에는 출입기자를 '성골, 진골, 평민'으로 구분했다. 성골은 종합일간지, 통신과 방송, 그리고 일부 영향력 있는 경제신문 기자들이었다. 진골은 영향력이 좀 떨어지는 경제신문 기자들이었다. 평민은 환경 전문지 기자들이었다. '평민 기자'는 기자실의 '텃세' 때문에 아예 기자실을 기웃거릴 수도 없었다. 공보관실에서 죽치거나,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희한한 '골품제도'는 기자들의 '소득'과 그대로 연결되었다. 성골에게는 당연히 '낑'이 제대로, 많이 분배되었다. 진골에게는 가끔 '낑'을 나눠주지 않고 물을 먹였다. 나눠줘도 조금씩만 나눠주는 경우가 많았다. 평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예 '낑'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환경처는 힘이 제법 있는 출입처였다. 환경 법규를 들이대면 웬만한 기업들은 모두 '항복'하는 출입처였다. 따라서 기업들은 기자들이 손을 벌리면 대체로 거절하지 못하고 '낑'을 바쳤다. 자발적으로 '낑'을 들고 오기도 했다. 나중에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적당히 봐달라는 일종의 '보험'인 셈이었다. '짭짤한' 출입처였다.
이렇게 물 좋은 출입처에서 '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니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진골 기자'들이 항의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그러면 간사가 마지못해서 '낑'을 나눠줬다.
그렇지만 그 규모는 성골만 못했다. 성골에게는 많은 '낑'을 나눠주고, 진골에게는 조금만 주곤 했던 것이다. 어떤 기자는 이를 "추수와 이삭줍기 차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나마 항의를 하지 않으면 그 몇 푼 안 되는 이삭조차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의 환경처 기자실은 '나쁜 기자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