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길들이는 첩경은 '잠 고문'
2007-09-05 뉴스관리자
이유인즉 왜 약속한 숫자만큼 매를 보내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조선은 '만만한' 대마도주에게 곤욕을 치루어야 했을까?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를 광해군 원년(1609)에 재개하고 일본에 대해 삼포를 열었다. 한데 이 조약문에는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해마다 일정한 수량만큼 매를 잡아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나아가 대마도주에게도 아들을 낳으면 3마리를 축하의 의미로 보내기도 했다.
이 숫자를 채우지 못하니 대마도주가 조선왕조를 향해 약속을 지키라며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매는 사냥용. 그렇다면 매는 어떻게 포획하고 사람이 부릴 수 있도록 길들였을까?
조선후기 때 박물학자 이규경은 그의 기념비적 걸작인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저술에서 희한한 매 길들이기 방식을 소개한다. 이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잠 고문'을 통해 매를 길들인다고 했다.
산에서 그물로 잡은 매를 새장 안에 가둬 두고는 20여 일 가량 잠을 자지 못하도록 고문하다 보면, 매가 나중에는 사람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게 된다는 것이다.
매사냥에서 유래한 일상어 중 하나가 보라매. 이규경은 같은 책에서 "햇 매를 길들인 것이 보라매(甫羅鷹)"라 하면서, '보라'라는 말은 "담홍색을 지칭하는 사투리"라고 덧붙였다.
이를 뒤집어 보면 야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에게 조종당하는 매가 보라매인 셈인데, 공군 혹은 전투기 조종사와 썩 어울리는 비유인지는 모르겠다.
세계 각지의 디딜방아를 뒤지고, 동아시아 뒷간 문화를 조사했으며, 그 뒤에는 지게 문화를 연구한 묵직한 단행본을 최근에 연이어 선보인 민속학자 김광언(金光彦.68) 인하대 명예교수가 이번에는 '한ㆍ일ㆍ동시베리아의 사냥'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부제가 '수렵문화 비교지'(誌)라는 데서 엿보이듯, 만주지역과 동부 시베리아 영역을 포함한 동북아 전체의 사냥문화를 공시적이며, 통시적으로 아우르고자 했다. 물론 항상 무게 중심은 한반도 수렵문화에 뒀다.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지내고 현재는 문화재위원회 민속분과위원장을 맡고있는 김 교수는 수렵 혹은 사냥의 문화사라는 측면에서 역사를 조망하면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다는 실례를 많이 보여준다.
예컨대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19년(기원전 1) 8월과 같은 왕 21년(서기 2년) 3월에는 각각 제물로 쓸 돼지가 달아나 올무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김 교수는 "올무라야 상처를 내지 않고 잡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종묘 제사 같은 신성한 의식에 올릴 희생물에 상처가 있어서는 동티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올무로 잡았다는 것이다.
또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10년(509) 3월 대목에 보이는 "서울에 함정을 파서 맹수의 피해를 없앴다"는 기록을 무심히 넘기곤 하지만, 김 교수는 "함정을 이용한 사냥으로 잡은 짐승은 가죽이 상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741쪽. 5만2천원.(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