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암투의 주인공 '궁녀' 엿보기
2007-10-04 뉴스관리자

김미정 감독의 데뷔작 '궁녀'(제작 영화사 아침)는 그동안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지만 주변인물에 그쳤던 궁녀를 소재로 삼아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영화다.
영화는 왕을 비롯한 남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왕의 여자들의 다툼을 중심에 둔다. 이는 나라의 권력을 놓고 사활을 건 남자들의 전쟁이 아니라 억압된 욕망에서 비롯된 여자들의 은밀한 암투다. 그러나 생활 속에 벌어지는 은근한 신경전을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는 여자의 한은 결국 피를 뿌리는 처절하고 살벌한 전투가 된다.
그 과정은 궁녀 살해사건을 중심으로 얽혔다 풀리면서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준다. 불과 사흘 동안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어 줄거리의 집중도가 높은 데다 개별 에피소드도 풍성하다.
시각적으로도 은근한 조명과 개방과 폐쇄를 안배한 공간, 낮은 채도의 의상, 섬세한 소품 사용이 차분하고 섬뜩한 궁중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주연에서 조연까지 대거 등장하는 여배우들이 나름대로 연기력과 개성을 뽐내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스릴러로 흐르던 영화가 후반부에서 서양식으로는 '판타지', 우리 식으로는 '괴담'과 결합하면서 큰 흐름이 흐트러진다. 또 끔찍한 형벌이 곳곳에서 지나칠 정도로 묘사되면서 관객의 뇌리에 공포물로서의 이미지를 깊게 새긴다. 이 점은 새로운 시도라는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놓치게 되는 아쉬움을 남길 수도 있다.
궁궐 안, 후궁 희빈(윤세아) 처소의 궁녀 월령(서영희)이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 정의로운 성격의 내의녀 천령(박진희)은 시신을 검안하던 중 월령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됐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월령의 시신에 아이를 출산한 흔적이 남아 있자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이란 의심이 짙어진다.
그러나 감찰상궁(김성령)을 필두로 한 상궁들은 천령에게 자살로 윗전에 보고할 것을 요구한다. 사건으로 궁중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물론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희빈의 입지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한 탓이다. 궁녀 출신인 희빈은 중전을 비롯한 왕의 여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들을 낳았지만 서슬 퍼런 대비의 미움을 받아 어린 아들이 원자로 봉해지지 못하자 전전긍긍하고 있다.
천령은 윗전의 위협에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숨진 월령과 같은 방을 썼던 수방 궁녀 옥진(임정은), 월령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중궁전 궁녀 정렬(전혜진) 등을 상대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18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연합뉴스).
<궁녀 3인방 인터뷰>
18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궁중 미스터리물 '궁녀'는 그야말로 '여자의 영화'다.
먼저 영화의 기본정보를 훑다 보면 수많은 여자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여자들의 권력 다툼을 그린 영화인 만큼 여배우가 대거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제작자부터 각본ㆍ연출을 맡은 감독까지 모두 여자다.
그러나 만든 사람과 등장하는 사람의 성별이 여자라는 점을 뒤로 빼더라도 '궁녀'는 인물과 이야기 면에서 진정한 여자의 영화다. 가슴 깊은 곳에 욕망을 숨기고 사는 궁녀부터 이성적인 내의녀까지 개성 있는 캐릭터가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 속의 치열하고 처절한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2일 열린 시사회 전에 영화 데뷔 10년차의 주연배우 박진희를 만났고 시사회가 끝난 뒤에는 제작사인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와 김미정 감독을 만났다.
박진희는 "신기하게도 스태프부터 배우까지 착한 사람밖에 없더라"고 말했고 정 대표와 김 감독은 "현장 분위기가 차분하고 합리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부지런하고 의리 있는 이 충무로 여장부들의 대화를 재구성했다.
--어떻게 시작된 영화인가.
▲집이 경복궁 근처라 어렸을 때부터 시간 나면 궁에 가서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준익 감독 밑에서 '황산벌' '왕의 남자' 연출부 일을 하면서 책을 많이 읽어 보니 궁이란 무서운 곳이더라. 욕망이 얽혀 있고 정치적인 곳이다. 또 이제까지 사극이 남성의 권력쟁탈전을 보여주면서도 여자는 그림자로만 그리지 않았나. 그 여자들을 기억해 주고 싶었다.(김 감독, 이하 김)
▲김 감독과 오랫동안 같이 하면서 기본적인 신뢰가 있었다. '이제 입봉(감독 데뷔)해야지, 어떤 걸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 얘기를 꺼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했다. 제목은 '궁녀'로. 이 영화는 다소 정치적인 영화다. 픽션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여자라는 것을 보여준다.(정 대표, 이하 정)
▲'간첩 리철진'(1999년) 때 만난 (정) 대표님이 김 감독님의 입봉작이라고 소개해 주셨다. 부족한 시절에 만났는데 좀 컸다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서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박진희, 이하 박)
--여자들의 만남은 어땠나.
▲박진희는 현장을 이끌어나가는 배우다. 디렉션을 하는데 본인이 이해가 안 되면 계속 이해될 때까지 묻는다. 서로를 가르치고 납득시키고 배우면서 했다. 전혜진(정렬 역)은 오디션에서 봤는데 얼굴에서 어떤 광기 같은 게 느껴지더라. TV 드라마에서 아역 은실이로 유명한 배우인지 사실 몰랐다. 몸으로 부딪히는 역할인데 잘 소화해 줬다.(김)
▲여자 감독이라 대화하기가 훨씬 좋았다. 인물의 감정 등 영화에서 디테일을 그리는 솜씨가 강하다는 것이 여자 감독의 큰 장점인 것 같다. 믿음직한 언니와 일하는 것 같았다. 또 영화를 하면 내가 돋보이고 싶은 건데 이번엔 드물게도 상대 배우가 잘 나올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스태프부터 배우까지 다들 너무나 착해서 즐겁게 일했다.(박)
--일각에서는 여배우가 많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한때는 '충무로에는 쓸 만한 여배우가 별로 없다'는 말까지 나온 적도 있다.
▲그게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반짝반짝하는 여배우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궁녀'에서는 여배우가 빛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김성령(감찰상궁 역)도 그렇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안정된 연기를 펼치는 여배우가 많지 않나.(김)
▲불과 사흘 동안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영화라 긴장감 속에 괴로워하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채찍질하면서 연기했다. 배우로서는 이제 데뷔한 지 10년이니 변화해야 하는 단계다. 스무 살 때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할 수는 없지 않나. 더 깊이 있고 넓어져야 한다. '저 배우가 나오면 저 영화는 어떻겠지' 하는 기대감이 드는 배우가 되고 싶다.(박)
--잔인한 장면이 너무 많다. 여자 감독이라 일부러 더 자제하지 않은 것인가.
▲여자가 만들었다고 해서 수위를 순화할 것도 없고 강화할 것도 없지 않나. (산세바스티안) 영화제 참석차 갔던 스페인에서 여자 감독이 더 잔인한 것 같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사실 남녀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사람마다 다 다른 거지. 일부러 여성적인 스타일로 만든 것도 아니다.(정)
▲그렇지. 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영화를 만든 건데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더했을 것이다. 수위가 오히려 약한 거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치열함을 보여줘야 했고.(김)
▲영화에서 사용되는 고문 도구가 생활 속의 도구라 더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옆에서 늘 보던 바늘 같은 것이 고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정)
▲스페인에서도 질문 받으면서 놀란 게 있다. 궁녀들은 다 프로페셔널이었다. 음식하는 전문가, 수놓는 전문가 등. 천령은 내의녀인데 사실 '닥터'에 가깝다. 그런데 간호사(nurse)로 번역이 됐더라.(김)
--현장에서 어려웠던 점은. '내가 남자였더라면'하고 느낄 만한 일들은 없었나.
▲현장 스태프들이 모두 남자였는데 일하면서 문제는 없었다. 생각이 다르면 조용히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수용할 만한 부분을 수용했다. 게다가 다들 술을 못해서 차 마시면서 얘기를 많이 했다. 이야기 자체가 그런 만큼 배우들도 연기에 몰입하다보면 가라앉기도 했고.(김)
▲나나 감독이나 촬영감독 같은 현장 수뇌부가 모조리 술을 못하니까, 우리는 남자들이 하는 술자리 대신 '티 타임'을 가지고 대화했다. 현장 분위기가 합리적이었다.(정)
▲내용이나 장르적으로 처음 시도되는 영화라 연기에 참고할 만한 작품이 없어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가 어려웠다. 촬영 횟수가 늘면서 새로운 캐릭터니까 '내 마음대로 연기하면 되겠구나'라는 걸 깨닫고 쉽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게 됐다.(박)
--어떤 영화로 봐줬으면 하나.
▲한마디로 '센 드라마'다.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잘 짜여진 영화지만 관객이 재해석을 다양하게 할 여지가 있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정)
▲오랜만에 관객이 생각하며 보는 영화가 됐으면 싶다. 그녀들의 삶을 돌아보고 기억하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김)
▲과거의 이야기지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면서도 세상을 좀 바꾸려고 노력한 여자가 있는 영화다. 생각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