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에 가려진 의약품 재분류의 '허실'
정부가 1년여에 걸쳐 준비한 의약품 재분류안을 발표한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각종 약품의 부작용과 국민건강을 위해 전문약과 일반약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게 그 골자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이를 위해 지난해 7월부터 6천700여개 의약품을 대상으로 재분류 작업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신규편입 및 허가취소 등이 반영된 6300여개 목록을 최근 공개했다. 법개정이 순리대로 진행될 경우 6천300여개 품목 중 526개(8.3%)가 일반약 또는 전문약으로 재분류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응급피임약이 유독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었던 사전피임제가 일반약에서 전문약으로 재분류된 게 문제다. 식약청이 이해관계자(의사-약사)들을 의식해 맞바꿔치기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식약청은 오는 15일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주제로 놓고 12명의 패널들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열기로 했다.
4주간 허용되는 의약품 재분류 이의신청 기간에 개최되는 공청회라고는 응급피임약에 관한 것뿐이다.
사실 전체 6천300여개 품목 중 응급피임약은 11개로 0.17%에 불과하다. 재분류 예정인 526품목과 비교해도 그 비중이 2.1%에 그친다.
1년여에 걸친 방대한 검토결과가 응급피임약 논란에 가려 나머지 의약품의 안전성은 소홀하게 다뤄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런 생각이 든다.
이 작업에 나섰던 식약청 관계자는 "방대한 자료를 각 성분별로 안전성 및 효용성을 조사하고 재분류의 타당성을 살폈고, 그 결과물을 내놨는데 온통 피임약에만 여론이 쏠리는 것 같다"고 아쉬워 했다.
실제로 6천300여개 품목을 살펴보니 제품명과 성분명만 따져도 A4용지 126페이지가 빼곡히 채워지는 방대한 자료였다. 여기서 특정 성분이나 제품이 재분류됐는지를 보려면 밤새 눈이 빠지도록 자료를 들춰봐야 하는 형편이다.
응급피임약 외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품목이 많다는 이야기다.
이번에 일반약에서 전문약으로 전환된 품목(273개)은 진통제 또는 소화제나 피부용제가 대부분이다. 이 중 근골격근이완제인 메토카르바몰 성분이 눈에 띈다. 메토카르바몰은 단일성분이든 아세트아미노펜과 복합제품이든 58개 품목 모두 일반약에서 전문약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해열.진통.소염제 성분 덱시부프로펜, 메페남산, 이부프로펜 등도 82개 품목도 마찬가지다. 약국에서 판매하는 대표적인 여드름치료제 크레오신티(한독약품), 건선 습진성 피부염에 사용되는 베베크림(고려제약) 등도 재분류 이후에는 처방전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다.
전문약에서 일반약으로 전환되는 품목(212개)은 진해거담제인 에르도스테인(44개), 알레르기성 비염치료제인 로라타딘(24개), 역류성식도염치료제 니자티딘(13개), 지사제 로페라미드염산염(13개) 순이다. 특히 전문약과 일반약으로 동시에 판매될 설사약(락툴로오스농축액)과 인공눈물(히알루론산나트륨)은 당분간 소비자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외에도 비만치료제 오르리스타트는 현행대로 전문약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제니칼(한국로슈) 등 5개사 6품목도 모두 전문약이 유지된다. 오르리스타트는 식욕감퇴제인 시부트라민이 시장에서 퇴출되면서 일반약으로 전환됐을 때 피임약과 더불어 시장규모가 커질 것으로 예상됐던 품목이다.
또 중독성 논란에 있었던 오트리빈(한국노바티스)은 앞으로도 약국에서 계속 구입할 수 있다. 자일로메타졸린염산염 성분의 오트리빈은 일주일 이상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사항이 표시돼 있지만 이를 지키는 만성비염환자는 드물어서 의사들로부터 전문약 전환이 요구된 바 있다.
이처럼 이번 의약품 재분류안에는 앞으로 남은 3주 간의 이의신청 기간 동안에 제대로 검토해야 할 내용이 방대하게 담겨 있다.
정부는 내년부터 5년마다 의약품을 재분류할 계획이라며 개선의 여지는 남겨 놨다.
이번 결정이 최소 5년을 끌고 간다는 점, 그리고 첫번째 성적표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앞으로 제도 운영의 방향이 좌우할 것이란 점에서 신중함이 요구된다.
관련 당사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 신중함이 응급피임약에만 한정되는 것 같아 유감스럽다.
[마이경제 뉴스팀/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윤주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