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기’… 배용준이라는 ‘판타지’의 재탄생

2007-12-05     헤럴드경제 제공

시청률 30%를 넘기며 화제를 뿌린 MBC ‘태왕사신기’가 5일 종영하면서 다시 한번 ‘욘사마’ 배용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고 있다. 눈부신 불빛 뒤로 숨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그이지만 그를 향해 쏟아지는 숱한 말들은 오롯이 그 빛을 향해 있다. ‘태왕사신기’로 ‘욘사마’를 넘어설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한 배용준. 그를 향해 또 한번 길게 말을 걸어 본다.

▶‘배용준의, 배용준에 의한, 배용준을 위한’ 태왕사신기

“이제부터 니가 있는 곳이 내 궁이야.” 담덕(광개토대왕)이 말한다. 수년만에 재회한 여인이 애써 마음을 숨기며 내뱉은 “임금님이시잖아요? 임금님은 궁에 계셔야죠.”라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

‘쥬신’의 운명을 타고난 담덕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또 한번 여심(女心)을 사로잡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대할 때는 물론이고 적의 수장에게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내민다. ‘태왕사신기’의 배용준은 또 하나의 이상적인 남성상을 제시하며 한 걸음 나갔다. 부드러운 미소를 품고 있지만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그의 표정은 외꺼풀 눈매의 절제된 눈빛과 함께 묘한 아우라를 풍긴다.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역사책 속의 광개토대왕은 배용준을 통해 ‘로맨틱함’을 얻었다. 긴 생머리에 이마를 살짝 덮는 앞머리, 그리고 뽀얀 피부와 곧게 뻗은 콧날은 ‘청순담덕’이라는 애칭을 탄생시켰고 그의 외유내강형 카리스마는 생명력이 넘친다. 전투신에서조차 거칠지 않고 세련된 우아함을 뿜는 것은 단순히 영상 기법만의 힘은 아니다.

‘태왕사신기’는 배용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드라마다. 600억이라는 제작비는 물론이고 3년이라는 사전 기획단계는 전적으로 욘사마의 후광에 기대 있었다. 제작일정이 지연돼 방영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기다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배용준의 드라마니까. 그리고 마침내 등장한 배용준은 초반의 우려를 씻으며 담덕이라는 캐릭터로 ‘욘사마’의 후광보다 더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태왕사신기’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광개토대왕이 ‘백호, 청룡, 주작, 현무’ 4개의 신물을 모아가는 여정을 그린 드라마. 이 이야기에 SF적 요소와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이 합쳐지면서 신화 속 세계를 재현해낸 판타지(Fantasy) 사극이 됐다.

그러나 드라마를 통해 구현된 배용준이라는 남성상 자체가 여성들에게 또 하나의 판타지다. 문화평론가 김원 씨는 “커피 광고 등에서 보여줬던 배용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완소남’(완전 소중한 남자)의 이미지가 드라마에 그대로 이어졌다. 이미지가 스토리를 뛰어넘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욘사마’, ‘욘사마’의 박제화를 거부하다

배용준은 한류를 소개하는 일본과 대만의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교과서 속에 실린 ‘겨울연가’의 준상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한 걸음씩 내딛어 왔다. ‘태왕사신기’까지의 여정은 쉽지많은 않았다.

배용준은 벼락스타가 아니다. 2002년 ‘겨울연가’ 한편으로 단번에 ‘욘사마’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욘사마’는 ‘겨울연가’ 이전부터 준비 단계를 거쳤다. 윤석호PD의 94년 연출작 ‘사랑의 인사로 데뷔한 배용준은 ‘젊은이의 양지’ ‘파파’ 등을 거치면서 귀공자 이미지로 굳어져갔다. 그러나 뿔테 안경에 포근한 머플러를 두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일면일 뿐이다. 1997년 어느날 그는 ‘첫사랑’에서 안경을 벗어버리고 오토바이를 타는 터프가이로 변신했다. 부드러운 남자로만 남아있기를 거부하면서 그는 성장해왔다.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1999)에서 김혜수와 호홉을 맞춘 그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야망을 키우는 청년으로 나온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대신 조건 좋은 여자를 택해 가지만 이런 그의 모습도 비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삶을 통찰하는 섬세한 감각으로 대사 이면의 울림을 주는 노희경 작가의 덕을 보긴 했지만 이전부터 쌓아올린 부드러움이 기회주의적인 드라마 속 캐릭터와 만날 때 효과는 더욱 극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또 의외의 선택을 한다. 2003년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 배용준이 출연한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었다. 바람둥이 선비 역할도 그렇거니와 첫번째 영화로 사극을 택한다는 것도 의외였다. 호사가들은 일본 팬들이 ‘욘사마’의 이런 모습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마디씩 했지만 배용준은 ‘욘사마’를 살아있는 배우 배용준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데뷔한지 13년만에 배용준은 한 아파트 광고에서 “배용준은 다 가진 남자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배용준은 영화 ‘외출’로 다시 부드러운 욘사마의 모습을 다시 선보이긴 했지만 정중동(靜中動)의 변주를 해 나가는 배우다. 그리고 이런 변신은 ‘담배도 자유자재로 끊는다’는 그의 독한 근성으로 완성된다. 일례로 곱상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는 2004년 공개한 사진집에서 깨졌다. 체지방률이 3.3%까지 내려가기까지 그는 하루 5시간 운동을 하고 턱에 근육이 생길때까지 닭가슴살을 씹었다. ‘한류는 거품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활동이 뜸한 그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배용준은 또 절치부심하며 ‘태왕사신기’를 준비한 셈이다.

▶배용준, 지상으로 내려설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로의 마음이 가장 좋은 집이잖아요.” 엄마는 ‘겨울연가’ 속 저 유명한 한국어 문장을 마치 비밀 암호인양 암기하시면서 뿌듯해 했다.’ 일본의 카피라이터 준코 마츠야마가 쓴 ‘배용준 론’의 일부분이다.

‘태왕사신기’는 시청률 30%를 넘기며 화제를 뿌렸지만 정작 배용준은 모습을 감췄다. 배용준은 드라마 속 대사처럼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긴채 팬들의 마음 속에서만 살고 싶어하는 것일까. ‘태왕사신기’ 제작발표회는 물론 스페셜방송에도 배용준은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순전히 드라마 속 영상과 이를 각인시켜가는 팬들의 마음 속에서만 살고 있는 셈이다.

배용준은 굳이 나서서 홍보를 할 필요가 없는 스타다. 최근 대중매체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그의 행보를 두고 신비주의 마케팅 전략을 쓰는 것 아니냐, 언론에 부담을 느끼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등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태왕사신기’가 방송되면서는 간간이 부상소식이 전해질 뿐이었고 그에 앞서서는 사업가 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그에 초점을 맞춰 그가 최대 주주로 있는 BOF엔터테인먼트의 사업관련 소식 등이 전해졌다. 연말 연기대상에서 강력한 후보로 오른 그의 모습을 연말 시상식에서 볼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가 됐다. BOF의 한 관계자는 “부상 정도가 심해 향후 검사 결과를 지켜봐야 하고 방송사 측과 이야기하겠지만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태왕사신기’에서 신화 속 환웅이 담덕으로 환생했듯 팬들은 하늘 위에 있는 그도 좋지만 땅 위로 내려와 한층 더 가까워지기를 소망한다. 실제로는 가까워질 수 없지만 자신과 가깝다고 느낄 때 스타의 매력은 배가 되기도 한다. 스타를 향한 이 모순된 감정 속에서 배용준은 어느 한 편만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배용준이 좋건 싫건 간에 배용준이 ‘겨울연가’ 이후 ‘태왕사신기’로 또 하나의 판타지를 선물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연주 기자(oh@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