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건강한 나라 만들기 위해 힘쓴 아워홈 구자학 회장 별세

2022-05-12     김경애 기자
"반세기 넘게 대한민국과 함께 정말 바쁘게 달려왔다. 오직 잘 사는 나라, 건강한 나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동안 같이 달려와 준 우리 직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대한민국 산업 1세대로 불리는 아워홈 구자학 회장이 12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아워홈 창업주인 고(故) 구 회장은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1960년 한일은행을 시작으로 호텔신라, CJ제일제당, 중앙개발, 럭키(현 LG화학), 금성사(현 LG전자), 금성일렉트론(현 SK하이닉스), LG건설(현 GS건설) 등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일선에서 뛰었다.

2000년 아워홈 회장에 취임해 아워홈을 글로벌 종합식품기업 반열로 올리는 데 일조했다.

구 회장은 1930년 7월 15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姑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주고등학교를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59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군복무 시절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호국영웅기장 등 다수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해 디파이언스 대학교(Defiance College) 상경학과를 졸업하고 충북대 명예경제학박사를 취득했다. 
 
▲고 구자학 아워홈 회장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당시 그는 '나라가 죽고 사는 기로에 있다. 기업은 돈을 벌어 나라를, 국민을 부강하게 해야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 일념 하나로 산업 불모지를 개척했다. 

1980년 럭키 대표이사 재직 시절 구 회장은 기업과 나라가 잘 되려면 기술력만이 답이라고 여겼다. 당시 세계 석유화학시장 수출 강국인 일본과 대만을 따라잡기 위해 기술 개발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아워홈에 따르면 당시 구 회장은 "우리는 지금 가진 게 없다. 자본도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도 없다. 오직 창의력과 기술, 지금 우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 공장을 가도 그의 손때가 묻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모든 현장을 찾았다.

기술력을 가장 중요시했던 구 회장은 '남이 하지 않는 것, 남이 못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늘 강조해왔다. 이 때문인지 그가 걸어온 길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다.

럭키는 1981년 '국민치약'이라는 수식과 함께 당시에 없던 잇몸질환을 예방하는 페리오 치약을 개발했다. 1983년에는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 PBT(Polybutylene Terephthalate, 폴리부틸렌테레프탈레이트)를 만들어 한국 화학산업의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았다.

1985년에는 화장품 '드봉'을 해외에 수출했다. 1989년 금성일렉트론에서는 세계 최초로 램버스 D램 반도체를 개발했으며 1995년 LG엔지니어링에서는 굴지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국내 업계 최초로 일본 플랜트 사업을 수주했다.

아워홈 측은 "현재 LG의 근간이 된 주요사업의 시작과 중심에는 늘 구 회장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1981년 럭키그룹 시무식에서 임직원들에게 신년사를 전하는 모습
▲1983 한·독 수교 100주년 기념사업 행사
▲1986년 금성사 대표이사 재직 시절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공장 준공식 참석
구 회장은 2000년 LG유통(현 GS리테일) FS사업부(푸드서비스 사업부)로부터 분리 독립한 아워홈 회장으로 취임해 20여 년간 아워홈을 이끌었다. 아워홈 매출은 2000년 2125억 원에서 2021년 1조7408억으로 8배 이상 성장했다.

이 기간 사업 포트폴리오도 다양해졌다. 단체급식사업과 식재유통사업으로 시작한 아워홈은 현재 식품사업, 외식사업과 함께 기내식 사업·호텔운영업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종합식품기업으로 거듭났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아워홈 관계자는 "LG에서 화학, 전자, 반도체, 건설,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핵심사업의 기반을 다진 경영자가 LG유통에서 가장 작은 아워홈 사업부를 분사 독립할 때 주변에서 의아해 하던 일화는 유명하다. 역량에 비해 너무 작은 규모의 사업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런 사업부를 몸 담았던 거대 조직의 어떤 도움도 없이 2조에 가까운 지금의 종합식품기업 아워홈으로 성장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매출 1조 달성 비전선포식
그는 생전 음식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먹는 만큼이나 만드는 과정을 좋아했다. 미국 유학 중 현지 한인마트에 직접 김치를 담가주고 용돈벌이를 했다.

아워홈에 따르면 구 회장은 LG건설 회장 재직 당시 LG유통 FS사업부에서 제공하는 단체급식에 불만을 가지고 개선 방안을 고민했다. 2000년 아워홈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맛과 서비스, 제조, 물류 등 모든 과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직접 현장을 찾아 임직원과 머리를 맞댔다. 

구 회장은 단체급식사업도 화학이나 전자와 같이 자신이 몸 담았던 첨단산업분야에 못지 않은 연구개발(R&D)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워홈은 단체급식업계 최초로 2000년 식품연구원을 설립했다. '단체급식 회사가 대량 생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연구원까지는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구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워홈 식품연구원은 설립 이래 지금까지 1만5000여 건에 달하는 레시피를 개발했다. 현재 연구원 100여 명이 매년 약 300가지 신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업계 최초 노로바이러스 조사기관, 축산물위생검사기관, 농산물안전성검사기관 등 공인시험기관으로서 역할도 수행하며 국내 안전 먹거리 생태계 조성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생산·물류 인프라 구축에도 적극 나섰다. 2000년대 초 구 회장은 미래 식음 서비스 산업에서 생산과 물류시스템이 핵심 역량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시 70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산·물류센터 부지를 찾아 전국을 돌았다.

현재 아워홈은 업계 최다 생산시설(9개)과 물류센터(14개)를 운영하며 전국 어디든 1시간 내 신선한 식품을 제공 중이다. 콜드체인 시스템이 물류 핵심 요소로 대두되기 전에 신선물류 시스템을 구축했다. 2016년에는 동종 업계 최초로 자동화 식자재 분류 기능을 갖춘 동서울물류센터를 오픈, 업계 최고 수준의 물류 인프라를 자랑하고 있다는 게 아워홈 측 설명이다.
 
▲2018년 직원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해외진출도 빨랐다. 아워홈은 2010년 중국 단체급식사업을 시작했다. 2014년에는 청도에 식품공장을 설립했다. 중국 식재료를 수급, 직접 생산해 단체급식 질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2017년 베트남 하이퐁 법인 설립을 통해 베트남 시장에 진출했으며 2018년에는 M&A를 통해 기내식 업체 HACOR를 인수하며 기내식 사업에도 진출했다.

HACOR는 현재 LA국제공항에 취항하는 항공사들에 기내식을 납품하고 있다. 북미 시장 단체급식과 식품사업 확대를 위한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내 업계 최초로 미국 공공기관 식음서비스 운영권을 수주했다. 미국우정청(USPS, United States Postal Service)과 구내식당 위탁 운영 계약을 체결한 것. 이어 폴란드에 법인을 설립하고 유럽 시장에 진출했다. 현재도 신규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고삐를 당기고 있다.

구 회장은 "국민 생활과 가장 밀접한 먹거리로 사업을 영위하는 식품기업은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과 책임감을 동시에 짊어져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아워홈을 경영했다. 무엇보다 국민 건강을 최우선의 가치로 뒀다. 80년대 럭키 대표이사로 재직할 당시 세상에 내놓았던 드봉, 페리오 등 생활 브랜드는 '국민의 건강한 삶'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 탄생했다.

와병에 들기 전 아워홈 경영회의에서 구 회장은 "요새 길에서 사람들 보면 정말 커요. 얼핏 보면 서양사람 같아요. 좋은 음식 잘 먹고 건강해서 그래요. 불과 30년 사이에 많이 변했습니다. 나름 아워홈이 공헌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합니다. 은퇴하면 경기도 양평에 작은 식당 하나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커져 버렸어요. 그동안 같이 고생한 우리 직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라는 말을 남겼다.

구 회장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5일이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김경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