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겨? 말아? 직장여성은 괴로워
밸런타인데이의 사회학
애인 선물보다 더 많은 지출에 부담스런 경조사로 변질… 받는 남자도 화이트데이 걱정‘찜찜’
#. 밸런타인데이는 경조사
원래 남자친구 초콜릿도 안 챙겼다. 밸런타인데이에 대해서만큼은 ‘쿨’한 나였다. 직장에 들어오면서 지조를 꺾었다. 동기들이 적어도 부서장 정도에게는 초콜릿을 준비해줘야 한다고 귀띔했다. 거너(?), XYZ(?) 등 싼 초콜릿을 알알이 뿌릴 수도 없고. 적당히 고급스러우면서도 양이 많지 않은 것으로 골라도 개당 만원이 훌쩍 넘는다. 직속 부장, 과장, 대리만 챙겨도 4만∼5만원은 너끈히 든다. 몇명만 골라 돌리기도 눈치 보인다. 솔직히 그 분들 초콜릿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영 쓸데없는 일 하는 거 나도 안다. 설에, 밸런타인데이에 온갖 경조사비로 연초를 시작하는 셈이다. (S그룹 3년차 26세 강모 씨)
#. 찝찝한 밸런타인데이 추억
뒤늦게 취직한 친구들에게 밸런타인데이만큼은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지난해 밸런타인데이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이다. 남자친구가 없어서 밸런타인데이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입사 첫해 괜히 눈치 없는 사람이 됐다. 동기들은 다 그럴 듯한 수입이나 수제 초콜릿을 준비해 왔더라. 같은 사무실에 막내 여직원이 둘, 셋인데 혼자 안 해오고…. 답답했다. 그 다음날 준비할 수도 없고 해서 결국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초콜릿을 사왔다. 고급스럽게 포장한 초콜릿을 책상 위에 놓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연애도 안 하는데 밸런타인데이라니…. (T회사 2년차 26세 신모 씨)
달콤 쌉싸래하다 못해 씁쓸하다. 직장생활하기 전까진 부담인 줄 몰랐다. 제과회사가 만든 상업용 기념일이라는 비판도 상관없었다. 수줍게 마음을 드러내는 설레는 날이었다. 하지만 직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 달뜬 설렘에 두꺼운 한 겹 덧칠이 가해진다. 가슴 떨렸던 밸런타인데이가 몇몇 직장녀에겐 동료자녀의 돌, 결혼식 등과 다름없는 경조사로 변질되는 비극까지 펼쳐진다.
밸런타인데이 D-day 2. 직장사회의 밸런타인데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밸런타인데이, 애인보다 직장을 사랑한다(?)=
11일 연봉전문사이트 오픈샐러리(www.opensalary.com)와 리서치기관 엠브레인(www.embrain.com)이 지난달 31일에서 지난 5일까지 직장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상사, 동기, 후배 등 직장 동료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기 위해 쓸 돈은 평균 4만5000원, 애인 선물용으로 초콜릿을 살 예산은 평균 4만원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총 640명 설문대상자 가운데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겠다고 응답한 375명에게 예산을 묻자 이런 결과가 나왔다.
직장동료를 위한 초콜릿 예산으로 3만원 이내를 답한 사람이 31.4%로 가장 많았다. 이어 3만∼5만원 29.7%, 5만∼7만원 22.3%였고 10만∼15만원을 쓴다는 사람은 12.6% 달했다. 애인 초콜릿 예산으로는 3만원 이내라고 응답한 사람이 33.3%로 가장 많았고 3만∼5만원 32%, 5만∼7만원 이내 24% 등이었다.
애인 1명을 위한 하나의 초콜릿 가격과 다수 동료를 위한 여러 개 초콜릿 값이라는 단서는 붙지만 외견상으로는 직장동료의 판정승이다. 돈으로 사랑을 측정할 수는 없다지만 다소 슬픈 결과다. 그만큼 직장동료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 몇 명이나 될까.
밸런타인데이 어떤 사람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겠느냐고 물었을 때(복수응답)도 직장동료는 친구, 애인을 눌렀다. 가족 58.5%, 직장동료 45.9%, 애인 39.4%, 친구 21.8% 순이었다. 외로운 싱글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직장녀에게 밸런타인데이는 더이상 로맨틱하기만 한 날이 아니라는 현실을 살짝 드러낸다.
과장급 이상 설문 대상자의 경우 직장동료에게 선물하는 비율이 가족에게 주겠다는 응답의 절반에 불과했다. 사원, 주임, 대리 등 아직 직급이 낮은 젊은 직장여성은 직장동료, 가족에게 초콜릿을 주겠다는 응답이 각각 50% 내외로 비슷한 수준으로 나와 눈에 띄었다.
많은 직장여성에게 밸런타인데이는 설렘이 아닌 부담이자 의무로 다가오기도 한다. 밸런타인데이 직장동료에게 초콜릿을 챙겨주는 것에 대해 ‘부담되지만 필요는 하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이 52.6%로 가장 많았다. ‘부담스럽지 않고, 필요하기도 하다고 생각한다’는 긍정적 응답도 41.1%로 적지 않았다.
물론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직장여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뿐히 ‘노(No) 밸런타인데이’를 선언하는 이도 많다. 직장생활 6년차로 최근 이직까지 한 임모(32) 씨는 자신 있게 말한다. “밸런타인데이는 물론 무슨 ‘데이’자 붙는 날에 직장동료 선물 챙긴 적 없다”면서 “차라리 정말 필요할 때 챙겨주는 것이 중요하지 배급하듯 나눠주고 받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총 640명 설문조사 대상 여성 가운데 40.5%인 259명이 밸런타인데이 어느 누구에게도 초콜릿 선물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받는 나라고 좋기만 할쏘냐
=받는 남자라고 속 편히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달 후 화이트데이면 직장여성과 똑같은 고민을 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 H기업에 다니는 박모(32) 씨는 “사무실에서 받는 초콜릿 뭐 좋아하는 이에게 몰래 받는 것도 아니고 여럿 나눠주는 것인데 받을 때 잠깐 좋긴 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다”면서 “준 사람 기억해둬서 한 달 뒤 사탕 선물해야 하나 이런 고민할 때 좀 한심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고 전했다.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탐탁지 않은 게 직장인의 밸런타인데이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하나의 이벤트로 자리잡으면서 본래의 의미, 취지는 희석되고 다른 방향의 의미가 확대되곤 하는데 밸런타인데이가 대표적”이라면서 “남이 주니 나도 주고, 남이 받는데 난 안 받으면 기분 나쁘고, 이런 동조와 모방현상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이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본래의 의미는 갖고 가되 초콜릿 선물을 주고받고 또 하지 않는 것 모두를 그냥 받아들이고 즐기는 현명한 소비자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조현숙.성연진 기자(newear@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