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 요청하니 30분간 전화 안 끊고 다그쳐...도넘은 계약 해지 방어에 소비자들 '끙끙'
카드사·보험사·렌탈업체 등 '관행'...개선 시급
2025-10-23 서현진 기자
#. 울산에 사는 정 모(남)씨는 올 10월 B보험사에 가입된 건강보험을 해지하기 위해 고객센터에 요청했으나 상담사에게 30분 넘게 해지방어를 당했다며 분노했다. 상담사는 타사보다 자사 상품이 더 좋다며 김 씨의 해지를 막았다. 김 씨는 "상담사에게 그냥 해지를 원한다고 몇십 번을 얘기했는데도 똑같은 말을 반복해 어이가 없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보험사 관계자는 "보험사는 보험 계약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상담사는 맡은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 서울에 사는 이 모(남)씨는 지난 8월 시아버지 댁에 있던 정수기를 해지하기 위해 C사에 철거 요청했으나 계약자 본인이 아니라며 거절당했다. 이 씨의 시아버지는 치매로 요양원 입소를 앞두고 있었지만 C사는 계약자 본인이 통화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지를 말해야 해지된다고 했다. 이 씨는 "사정한 끝에 결국 가족관계증명서를 팩스로 보내라는 답변을 받았으나 그 후에도 전화 연결이 힘들었다"고 분노했다. 렌탈업체 관계자는 "본인만 해지할 수 있는 규정은 없으나 일신상 사유로 통화가 어려운 상황이면 가족관계증명서로 가족이 대신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 대구에 사는 김 모(남)씨는 9월 D통신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콜센터에 전화했으나 실패했다. 상담사는 김 씨의 개인정보를 확인 후 해지 사유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김 씨는 "계약기간이 만료해 타 통신사와 계약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상담사는 "휴대폰도 타사로 옮겼는데 인터넷도 옮기냐, 어떤 통신사로 옮길 건지 다그쳤다"며 10분 동안 김 씨의 해지를 막으려고 나섰다. 김 씨는 "사유를 말했으면 끝나는 거지 자꾸 어디로 옮겼냐 캐묻고 10분 이상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며 "결국 해지 신청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D사는 "해지 요청 시 방어가 우선이지만 고객이 계속 요구한다면 해지해준다"고 답했다.
렌탈가전, 보험, 신용카드, 인터넷 등 각종 서비스 계약을 해지하려는 소비자들이 상담사들의 집요한 만류에 시달리는 등 해지 방어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일부 상담원들은 수십 분 동안 해지를 막기 위한 설득을 이어가거나 아예 해지전담부서가 전화를 받지 않는 방식으로 ‘방어’에 나서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업체들은 단순 해지 방어가 아닌 이용자 보호 차원이라는 주장을 폈다. 고객센터 상담사의 주요 역할은 계약 해지시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안내하고 현재 고객이 받고 있는 서비스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23일 소비자고발센터(www.goso.co.kr)에 따르면 보험, 카드, 렌탈, 통신 등 다양한 업권에서 계약 해지 방어에 대한 소비자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업권 대부분 해지 방어 유형은 비슷한 형태를 띈다.
계약자 본인이 고객센터에 직접 연락해 해지를 요청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상담사들이 해지 사유를 꼬치꼬치 물으며 해지를 막거나 상담사들이 계속 돌려 받으며 해지를 어렵게 하는 식이다. 계약자가 치매 등 피치못할 사정으로 정상적인 통화가 어려운데도 반드시 계약자와의 연결만 고수하기도 한다. 해지 전담 콜센터가 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답답하다는 민원도 속출하고 있다.
▲카드사는 탈회하는 방법이 어렵다는 민원이 속출하고 있다. △신한카드 △삼성카드 △현대카드 △ KB국민카드 △하나카드 △우리카드 △롯데카드 △비씨카드 등 카드사들은 카드 해지보다 탈회의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에 탈회하기 위해선 카드사 앱이 아닌 고객센터로 전화 연결을 해야 한다. 그러나 카드사의 경우 전화 연결이 어렵다는 민원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장기 계약이 대부분인 보험은 고객을 최대한 묶어두기 위해 공격적인 해지 방어를 펼친다. △삼성화재 △DB손해보험 △메리츠화재 △현대해상 △KB손해보험 △한화손해보험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신한라이프생명 등 생·손보사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보험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코웨이, 쿠쿠홈시스, SK인텔릭스, 청호나이스, 교원웰스, 현대큐밍 등 가전렌탈업체의 경우 고령 소비자층에서 이같은 민원이 주로 발생했다. 부모 집에 설치된 정수기 등 제품을 요양원 입소 등 피치못할 사정으로 해지해야 할 경우 고령층인 계약자 본인과의 직접 전화를 고수해 해지를 막는 식이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LG헬로비전 등 통신사도 예외는 아니다. 해지하기 위해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해지 사유를 묻거나 다른 계약 조건을 권유하는 등 해지를 방해해 소비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소비자들은 "해지하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해도 상담사들이 계속 막으니 화가 나서 전화를 끊게 된다"고 울분을 토했다. 업체들은 공통적으로 "해지 시 안내사항들이 많아 상담사의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 해지 방어 아닌 '이용자 보호' 차원?...소비자 전문가 "권리 침해"
대형 카드사 관계자는 "고객을 모집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고객들이 어떤 이유로 해지하려고 하는지 알아야 회사 입장에선 개선할 부분을 찾는다든가 대책을 세울 수 있다"며 "반드시 해지를 막기 위해서라기보단 자동이체나 잔여 포인트 등이 정리되지 않을 수도 있어 그 부분을 안내하기 위해 전화를 오래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보험사로선 보험계약 유지가 가장 중요해서 상담사에게 그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라며 "또한 계약 해지 시 그동안 쌓인 보험료나 놓치게 될 보장 등 1차적으로 안내가 필요하고 결국 기존 보험 계약에 대한 장점을 얘기하는 것이 공통적인 절차"라고 답했다.
고령층의 본인 확인으로 인해 해지가 어려운 렌탈업체는 인증 절차를 거치면 해지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해명했다.
렌탈업계 관계자는 "개인정보 보호 및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계약자 본인이 직접 접수해 본인 확인 인증 절차를 거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신사들의 경우 산업 특성상 해지하면 결국 다른 통신사를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객 이탈 방지가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통신이란 해지한다고 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국 다른 통신사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며 "그렇다 보니 해지 사유가 TV나 인터넷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면 고객 잔류를 권한다"고 말했다.
소비자 전문가들은 업체의 해지 방어가 명백한 소비자 권리 침해라고 지적했다.
서용구 숙명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입장에선 고객을 최대한 유보하기 위해 계약 해지를 딜레이시키는 게 전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공정하지 않다고 본다"며 "소비자들이 계약 해지의 사유를 밝혔을 때 원인을 소명하고 빠르게 해지해 주는 것이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수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고객이 계약을 체결할 때는 모든 편의를 다 봐줄 것처럼 하다가 해지하려고 하면 절차를 까다롭게 한다든가 해지 방어 때문에 시간을 들인다든가 하는 건 소비자 권리 행사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며 "이런 해지 방어 영업 형태는 지양해야 하고 소비자가 해지 의사를 밝히면 간단하게 위약금 안내나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빠르게 해지하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우성 사무국장 또한 "계약 해지는 소비자 권리 행사인데 그걸 방어하는 건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며 "물론 계약 해지 시 상담사가 고객에게 고민할 여유를 주는 건 틀렸다고 보기 어렵지만 도를 넘어서 소비자가 하는 행위를 막는 건 권리 침해"라고 비판했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