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김해숙 "엄마가 여자이듯 배우는 나이 들어도 배우다"

2008-04-01     스포츠연예팀
오봉숙. 쉰한 살. 허름한 동네 노래방을 하고 있고, 가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하숙을 치고 있다. 여자? 여자라는 걸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 난데없이 사랑이 찾아왔다. 하숙생이자 사위가 될 뻔 했던 서른살 남자다. 술 취한 그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덜컥 임신을 했다.

바람을 피고 있던 남편은 아내가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나서 부산해진다. 협박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지만 이 여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미안한데,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 아이는 뒤늦은 선물"이라며.

영화 '경축! 우리사랑'(감독 오점균, 제작 아이비픽쳐스)이 신선한 접근과 배우들의 호연으로 7억 원짜리 저예산영화임에도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책이 안서는 '아줌마'를 연기한 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주가를 높여가고 있는 중견 김해숙(53)이다. 영화는 배우들, 그 중 핵심인물인 김해숙의 호연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해숙은 이 영화에서 드라마 '가을동화' '장밋빛인생', 영화 '우리형' '해바라기' '무방비도시'와 또 다른 엄마상을 보여준다. '엄마도 여자다'라는 평범한 사실을 뒤통수를 치듯 갑작스럽고 당당하게.

"항상 엄마에 도전해왔죠. 이제는 제가 생각해도 배우로서 힘이 생겼다는게 느껴집니다. 항상 도전을 꿈꿨고, 일을 사랑했고. 이제야 내가 꿈꿨던 게 이런 거구나, 라고 생각해요."
그랬다. 김해숙은 찬조출연한 '장밋빛인생'에서도 온 힘을 다바쳐 연기했고, '무방비도시'에서는 소매치기의 모정을 그렸다. 작품을 할 때마다 그는 "또 다른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겠다. 엄마라고 늘 같은 엄마가 아니다"라며 의욕을 보여왔고, 보는 이의 가슴을 적시도록 진심을 다해 연기했다.

스물한 살 어린 남자와의 사랑에 설레는 아줌마의 모습은 자칫 추해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아슬아슬한 지점을 넘지 않으려고 굉장히 힘들었다.

"이 영화는 조금만 잘못 비춰지면 추해보일 수 있어요. 간발의 차이죠. 그래서 더욱 진지하게 연기했습니다. 여자인 것 조차 잊어버린 여자가 사랑을 느껴 배시시 웃는 그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자신을 삶을 되돌아 볼 여유조차 사치인, 어찌보면 주변에서 늘 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여자의 모습, 아내의 모습을 그리다 젊은 남자의 맨살을 보고 그 순간 여자로 되돌아오는 감정을 표현해야 했거든요."

그는 "무미건조한 여자를 표현했을 때도, 그런 여자가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도, 임신했을 때도 관객에게 타당성을 느끼게 하는게 내 몫이었고 그걸 잘 표현해야 영화의 진정성이 살아나기에 쉽지 않았다"며 만만찮은 작업이었음을 내내 토로했다.

"정말 다행이지요. 관객이 기분좋게 웃으며 즐기다가 영화의 의미를 알아주는게. 재미있으면서도 가볍지 않게 받아들여주셔서 배우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최근 영화속 엄마는 날로 진화하고 있다. 자식에 대한 무한한 모정을 묘사하는데 그쳤던 것에서 엄마라는 존재 자체가 주체적으로 서고 있다.

"세월이 변했죠. 엄마는 살다보면 스스로도 여자라는 걸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도 새로운 가족 관계의 중심에 선 사람이 엄마이듯 엄마의 힘은 보이지 않지만 강하죠. 가족 모두가 엄마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죠."

첫사랑처럼 느껴진 남자와의 하룻밤에서 얻은 아이는 어찌보면 엄마 자신이다. 뒤늦게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느끼며 갖게 된 아이는 그 상징이기 때문.

배우로서 김해숙은 전성기를 맞고 있다. 본인은 "전성기라고 말하기가…"라며 쑥스러워했지만 최근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업계 종사자와 관객,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건 확실하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것만큼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요. 배우가 그만한 연기를 한다는 건 말못할 노력이 있었던 거잖아요.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해 좋은 평가를 받고, 좋은 감독과 좋은 작품을 만나게 돼 배우로서 더 이상 바랄게 없죠."

그는 최근 드라마 촬영 도중 진짜 "만세"를 외칠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을 맞았다. 평소 존경했던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같이 하자고 연락했을 때다.

"박감독과 첫 미팅이 있던 날 신혼 첫날밤처럼 떨렸습니다. 한숨도 못 잤죠. 정말 좋아했던 감독이었는데 하다보니까 같이 일할 날이 오는구나 싶어 가슴이 벅찼어요."

박찬욱 감독, 후배지만 연기에 탄복해온 송강호, '우리형'에서 좋은 인연을 만들었던 신하균과 함께 작업하게 됐다. 이들은 '경축! 우리사랑' 시사회때 응원하기 위해 단체로 자리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어찌나 이들이 박장대소를 하던지. 김해숙은 "누군가 '알바 풀었냐'고 묻더라"며 웃었다.

"'박쥐'에서 또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연기하게 됐어요 그런 캐릭터가 내게 와주는 것, 이걸 할 수 있겠다고 나를 믿어주는 것이 고맙죠. 이제는 날개를 펴고 싶어요. 제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표출하도록. 날개를 펴서 훨훨 날고 싶습니다."

엄마가 여자이듯, 배우는 나이가 들어도 배우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