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출범과 함께 새 내각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정치권의 시급한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 내정자의 자격을 검증하는 인사청문회의 단골 메뉴로는 병역문제, 부동산 투기, 탈세 등이 있지만 최근에는 ‘사외이사’가 새롭게 주목을 받는 추세다.
정홍원 총리를 비롯한 몇몇 부처의 장관 내정자가 과거 대기업 사외이사를 맡았던 사실이 새삼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사외이사가 본래의 감시기능은 하지 못한 채 거수기 노릇만 하면서 후한 대접만 받고 있는데 대한 사회적 눈총이 따갑기 때문이다.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대표 박주근)는 최근 우리나라 상장기업 사외이사의 평균 보수가 4천560만 원에 달하고 30대 그룹 계열사의 경우 6천839만 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30 그룹 계열사 사외이사들의 경우 분기에 한번 정도 회의에 참석한다고 가정하면 1회에 1천710만원의 수당을 받는 셈이다.
특히 삼성전자(8천800만 원)와 현대자동차(8천400만 원), SK텔레콤(8천160만 원), 삼성전기(8천20만 원)는 사외이사 평균 보수가 8천만 원을 넘겼다. 이를 월급으로 환산하면 670만~738만 원에 이른다.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사외이사들이 이사회 몇 번 참석하는 대가로 보통 사람들의 1년 연봉 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이 사외이사 선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 소액주주 운동이 활발해지고 기업의 경영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거세진 탓이다.
기업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감시기능을 할 수 있는 외부 인사를 이사회에 참여시켜 오너의 독단으로 불합리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것을 막겠다는 게 기업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같은 취지와 달리 사외이사가 제대로 된 감시 기능을 해내지 못하면서 이사회에서 찬성표만 던지는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이로 인해 사외이사를 맡았던 경력이 비판의 꼬투리를 제공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대선 때 안철수 전 교수의 경우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이사회에 상정된 235건의 안건 가운데 226건에 찬성표를 던져 거수기 노릇만 했다는 여권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최근에는 새 정부의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된 김병관 내정자가 과거 자신의 경력과는 무관한 동양시멘트의 사외이사를 맡았던 전력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
김 내정자는 동양시멘트 사외이사로 있는 동안 이사회는 거의 참석하지 않으면서 모든 안건에 찬성표를 던져 하는 일 없이 보수만 받았다는 지적을 사고 있다. 또 김 내정자가 사외이사로 있을 당시 동양시멘트가 주한미군 공사를 수주한 것과 관련해서도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내각을 이끌어야 하는 정홍원 총리도 과거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 사이외사를 지낸 경력이 도마에 올랐다.
정 후보자는 사외이사 시절 수당으로 1천200만 원을 받아 시간당 270만 원의 보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배우자가 하이닉스 주식을 보유했던 것으로 드러나 시세차익을 노린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 밖에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으로 취임 후에도 대우인터내셔널 사외이사를 바로 사임하지 않아 겸직 의혹을 받고 있다. 또 이동필 농림축산부 장관 내정자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근무하며 농협자회사인 (주)한삼인의 사외이사로 활동할 당시에 받은 활동비와 수당을 제대로 보고했는지 여부를 추궁 받고 있다.
이처럼 고위 공직자와 유력 정치인이 사외이사 경력으로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은 기업들이 이른바 ‘실세’를 사외이사로 영입해 방패막이로 쓰고 있다는 지적과 무관치 않다.
이와 관련해 눈에 띄는 것이 10대 재벌 기업 사외이사의 전, 현직을 분석한 CEO스코어의 조사 내용이다.
CEO스코어가 지난 22일 10대 재벌기업 92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323명(중복 9명)의 현직이나 출신 직종을 분석해 발표한 데 따르면 현직 대학교수와 대학교수 출신이 140명으로 전체의 43.7%를 차지했다.
그 다음으로는 법조인 출신이 48명(15.2%), 관료출신이 42명(12.7%), 세무공무원 출신이 19명(5.3%)으로 나타났다.
대학교수가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고위 관료와 세무공무원, 법조인이 30%를 넘겨 사외이사 선임에 있어 ‘전관예우’가 중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기업들이 사외이사들에게 근무일수나 업무량에 비해 과도한 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유력인사를 모시기 위한 방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고위 공직자들은 퇴임 후에도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품위유지를 할 수 있고, 기업은 연줄을 확보할 수 있으니 그야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형국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학교수와 전직 관료들 사이에선 대기업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것이 또 다른 ‘감투’를 쓰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좀 더 큰 기업의 사외이사를 맡기 위해 남몰래 공을 들인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다.
기업 오너의 전횡을 감시하기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제가 어느새 가진 자들끼리의 커넥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