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알코올전문병원을 표방하며 설립된 카프병원이 폐업 위기에 몰렸다. 매년 50억원을 출연하며 병원설립을 후원했던 주류업계가 지원을 뚝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류업계는 그동안 알코올중독을 치료하는 병원이 많이 세워져 카프병원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깔려 있는 것으로 전해져 입맛을 쓰게 만든다.
카프병원은 하이트진로, 롯데칠성음료, 오비맥주, 디아지오코리아, 페르노리카코리아 등 14개 주류업체를 회원으로 두고 있는 한국주류협회의 지원으로 설립됐다.
병원설립을 위해 지난 2000년 카프재단(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이 먼저 설립됐고, 카프병원은 2004년 문을 열었다.
당시 국내에 알코올중독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원이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주류협회가 연간 50억원을 지원해 카프병원을 설립하기로 한 것은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카프병원은 비영리재단을 모태로 하고 있어 치료비가 민간병원에 비해 훨씬 저렴해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일산에 있는 카프병원을 비롯해 마포에는 국내 최초의 알코올상담소도 운영중이다.
특히 카프병원은 억지로 알코올중독 환자를 입원시키지 않아 단순 감금시설과 차별화된다. 다른 병원과 달리 알코올중독에 대한 연구, 치료, 재활, 예방까지 단계별 맞춤치료로 단주(술을 끓음) 성공률도 높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카프병원은 현재 폐업위기에 몰려 있다.
지난 2010년말에 당시 김남문 주류협회장이 재단에 알코올중독 치료 및 재활사업을 중단하고 병원건물 매각을 권고한데 이어 출연금 지급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주류업계의 지원이 끊긴 후로 고사위기에 몰린 카프병원은 조만간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다.
주류협회가 폐업을 주장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2000년대 초반과 달리 알코올중독을 진료하는 병원이 전국에 430여 개나 생겼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카프병원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병원사업은 시범적으로 도입한 것이고, 이제는 그 돈으로 청소년 대상의 건전음주 홍보를 강화하는게 낫다는 설명도 따른다.
그러나 카프재단 노동조합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주류협회장이 재단 이사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원진을 국세청 출신의 낙하산 인사로 채우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폐업카드를 들고 나왔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주류협회장은 2000년 이후 국세청 간부 출신이 이어왔으며 이들이 카프재단 이사장을 겸직했다.
올해 3월에도 권기룡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이 주류협회장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카프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려 했으나 노조의 반발로 무산돼 이사장 자리가 6개월째 비어있는 상황이다.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주류협회 측은 회원사들이 병원사업의 효과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어 폐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노조측은 카프재단에서 발표하는 음주 관련 실태조사가 주류업체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런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돈을 지원하고도 생색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병원을 닫는 건 당초 사업의 취지를 무시한 처사가 아니냐는 게 노조의 지적이다.
사실 주류업체들이 알코올치료사업에 자금을 댄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는 하다.
해외에서는 주류기업이 알코올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서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 자칫하면 ‘병 주고 약 준다’는 식으로 음주피해자들의 소송을 맞기 십상이라는 이유에서다.
카프재단은 2000년 주류에 건강증진기금을 부과하려는 법안이 추진되자 주류업계가 술 문제에 책임을 다하겠다며 대국민약속으로 설립됐다.
술 문제에 책임을 하겠다는 말과 애초에 시범사업이었다는 이야기는 아귀가 맞지 않는다.
주류협회와 업체들이 이제 와서 병원사업에 발을 빼겠다는 건 '화장실을 가기 전과 가고 난 후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당장 직장을 잃게 된 직원들의 사정도 딱하지만 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카프병원을 이용했던 환자와 그 가족들은 이제 어쩌란 말인가?
주류업계가 '책임'이라는 단어의 뜻을 되새겨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