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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 거세당한 꿈이여 부활할지니! 뮤지컬 ‘맨오브라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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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 거세당한 꿈이여 부활할지니! 뮤지컬 ‘맨오브라만차’
  • 뉴스관리자 csnews@csnews.co.kr
  • 승인 2010.02.02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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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만차(La Mancha)에 가본 적이 있다. 라만차는 에스파냐 중남부의 고원지대 남부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바람이 많이 불고 찬란한 햇빛이 내리쬔다. 여기는 톨레도 산악지대에서 쿠엥카산맥의 서쪽 지맥까지, 라알카리아에서 시에라모레나까지 사이에 펼쳐진 불모의 해발고도 680~710m의 고원지대다. 넓은 평야 끝에는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 풍차들이 늘어서있다. 누가 그 풍차를 보고 꿈을 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야를 지나는 늙은 기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옆에는 종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있다. 그들이 풍차를 향해 간다. 나와 같은 꿈을 꾸나 싶었다. 아뿔싸! 갑자기 그가 풍차로 돌진한다. 이어 만신창이가 돼 돌아온다. 그러더니 변장을 한 거인이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름을 물었다. 이름만 물었을 뿐인데 늙은 기사는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썩을 대로 썩은 세상, 죄악으로 가득하구나. 나 여기 깃발을 높이 들고 결투를 청한다. 나는 돈키호테, 라만차의 기사, 운명이여 내가간다. 거친…….’ 아, 이 비장한 눈빛의 기사 이름이 돈키호테다. 그런데 기사라고 하기엔 좀 늙었다. 그리고 관절염에 걸렸는지 부실해 보인다. 칼을 들 기력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산초와 함께 황당한 모험을 시작한다.

- 가장 초라한 몸으로 가장 큰 꿈을 꾸는, 세상의 기사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 ‘캣츠’를 세계 4대 뮤지컬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세계 4대 뮤지컬은 좀 다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 하이드’, ‘노트르담 드 파리’ 등이 포함될 듯하다. 그리고 ‘맨오브라만차’가 있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에는 샹들리에가 객석으로 떨어지거나 헬기가 등장하는 등 탄성을 자아낼만한 무대장치나 효과가 없다. 그저 스페인 지하 감옥의 어둡고 음습한 기운만이 있을 뿐이다. 세르반테스는 이 지하 감옥에서 변론을 위해 하나의 극을 선보인다. 이 작품은 극중극 형식을 띈다. 공연은 세르반테스가 묘사하는 알론조, 즉 수많은 편력기사들의 이야기책을 읽다가 제정신을 놓아버린 후 스스로 기사의 행보에 나선 돈키호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시작부터 한껏 조롱을 받는다. 풍차를 괴수라 하면서 달려드는 한편 성이랍시고 여관으로 들어간다. 하녀 알돈자를 꿈의 여인 둘시네아라 부르며 무릎을 꿇고, 여관 주인에게는 기사작위를 수여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발장수의 면도대야를 손에 쥐고는 비장하게 말한다. ‘오, 황금투구여!’

세상이 돈키호테를 비웃는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진지하다.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돈키호테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친절과 예의, 용기를 온 몸으로 실천해낸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 돈키호테가 우스워서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는 우리에게 세르반테스가 소리친다.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미쳐 보입니까? 아니요, 아니요!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 될 수도 있다오. 그중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죠!” 제정신이 아닌 세상에서 문제없이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미친 게 아닌가. 정신없이 돌아가기만 하는, 풍차 같은 현실을 향해 돌진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돌아오는 돈키호테가 말없이 우리를 다그친다.

- 불가능한 꿈을 이룬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

이상과 환상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돈키호테와 달리 산초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믿고 현실을 안다. 산초는 돈키호테의 기이한 행동들과 쓸데없이 넓은 호기심으로 매번 곤경에 처한다. 산초는 돈키호테의 그 광기에 기겁하지만 동시에 매혹 당한다. 그리고 돈키호테를 사랑한다. 알돈자가 돈키호테로 인해 삶이 변한 것처럼. 관객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데는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캐릭터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 역시 이 작품의 넘버들이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의 음악은 단연 압권이라 할 수 있다. 귀와 심장에 착착 감기는 음악 덕에 흥분한 맥박은 점차 빨라진다. 풍자와 유머로 가득한 넘버부터 삶을 저주하는 알돈자의 절규, 불가능한 꿈을 향해 팔을 뻗는 돈키호테의 꿈, 산초의 천진함까지 각 캐릭터들의 성격과 개성에 맞는 곡들이 극 전체와 함께한다. 무엇 하나 버릴 곡이 없다.

자신이 위엄 있는 기사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늙은이 알론조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 그는 비참해진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비난 받았을 때도 찾아오지 않았던 절망이 이제 검은 옷을 입고 다가온다. 이상과 꿈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삶, 남은 일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뿐이다. 절망하는 알론조, 황당한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 이 모든 것을 표현하는 정성화의 연기는 대단했다. 그의 진지하면서도 익살맞은 모습들을 보는 동안 인간 정성화는 보이지 않을 정도. 산초의 이훈진과 알돈자의 김선영을 비롯, 모든 조연 및 앙상블들 역시 속이 꽉 찬 무대를 선보였다. 인간을 체스 말로 비유해 상황을 체스로 묘사하는 등의 재치와 적절한 무대변화, 매력적인 캐릭터와 마음을 울리는 음악의 결과는 커튼콜에서 나타났다. 쏟아지는 기립박수 한가운데 돈키호테가 서 있었다. 우리의 잃어버린 꿈의 모습을 하고 꿋꿋하게 서 있었다.

[뉴스테이지=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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