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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맛으로 전세계를 울렸다"…라면 거장 신춘호 농심 회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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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맛으로 전세계를 울렸다"…라면 거장 신춘호 농심 회장 별세
  • 김경애 기자 seok@csnews.co.kr
  • 승인 2021.03.2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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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촌(栗村) 신춘호 농심 회장이 27일 영면에 들었다. 향년 92세. 농심 창업주인 신 고(故) 회장의 손에서 탄생한 라면과 스낵은 국민 삶과 깊숙하게 연결되며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신춘호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필순 여사의 5남 5녀 중 셋째 아들이다.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부회장), 신동윤(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회장 부인) 3남 2녀를 뒀다.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故 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시작했으나 1963년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해 롯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농심의 모태가 됐다.

신춘호 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춘호 회장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하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해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는 것. 아울러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심그룹에 따르면 "스스로 서야 멀리 갈 수 있다.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라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라면쟁이, 스낵쟁이라 부르며 직원들에게 장인정신을 주문하곤 했다.
 

▲신춘호 농심 회장이 27일 향년 92세 나이로 별세했다
▲신춘호 농심 회장이 27일 향년 92세 나이로 별세했다
신춘호 회장은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뒀다. 평소 "다른 것은 몰라도 연구개발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라"고 했다. 라면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던 일본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은 수월했겠으나 농심만의 특징을 담아낼 수도 나아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71년 새우깡 개발 당시에도 "맨땅에서 시작하자니 우리 기술진이 힘들겠지만 우리 손으로 개발한 기술은 고스란히 우리의 지적재산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우깡은 4.5톤 트럭 80여대 물량의 밀가루를 사용하면서 개발해 냈다. 

1982년 안성공장 설립 당시 일화는 신춘호 회장의 고집을 여실히 드러낸다. 신춘호 회장은 국물맛에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선진국의 제조 설비를 검토하되 한국적인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턴키방식의 일괄 도입을 반대했다. 선진 설비지만 서양인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된 것이어서 농심이 축적해 온 노하우가 잘 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주문한 것이다. 

신춘호 회장은 브랜드 전문가로도 이름높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 농심의 역대 히트작품에는 신춘호 회장의 천재성이 반영돼 있다. 

신춘호 회장의 대표작은 신라면이다. 

출시 당시에는 파격적인 이름이었다. 당시 브랜드는 대부분 회사명이 중심이었고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춘호 회장은 "저의 성(姓)을 이용해 라면 팔아보자는 게 아닌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辛'으로 하자는 것"이라며,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

신춘호 회장이 브랜드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1970년 짜장면이 실패하면서부터다. 유명 조리장을 초빙해 요리법을 배우고 7개월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내놓은 국내 최초 짜장라면 '짜장면'은 출시 초기 소위 대박이 났다.

하지만 비슷한 이름으로 급조된 미투 제품의 낮은 품질에 불만을 느낀 소비자들은 짜장라면 전체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농심의 짜장면도 사라지게 됐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제품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로 확실한 차별화 전략이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국민 라면으로 등극했으며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신춘호 회장은 해외진출 초기부터 신라면의 세계화를 꿈꿨다. 한국 시장에서 파는 신라면을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는 전략이었다.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당시 신 회장은 "농심 브랜드를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 얼큰한 맛을 순화시키지도 말고 포장디자인도 바꾸지 말자. 최고의 품질인 만큼 프리미엄의 이미지를 확보하자. 한국의 맛을 온전히 세계에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고급의 이미지도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제품인데 나라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농심이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창업 6년만인 1971년부터다. 지금은 세계 100여 개국에 농심이 만든 라면을 공급하고 있다. 유럽의 최고봉에서 남미의 최남단까지다. 농심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9억9000만불(한화 약 1조1202억 원)의 해외 매출을 기록했다.  

실제 신라면은 미국 현지 시장에서 일본 라면보다 3~4배 비싸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 유통채널에서는 물론이고 주요 정부시설에 라면 최초로 입점돼 판매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한국 특유의 얼큰한 맛으로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농심은 2011년 프리미엄라면 '신라면블랙'을 출시했다. 신라면블랙은 출시 초기 규제와 생산 중단의 역경을 딛고 지난해 뉴욕타임즈가 꼽은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올랐다. 
 

신춘호 회장의 마지막 작품은 옥수수깡이다. 신춘호 회장은 "원재료를 강조한 새우깡이나, 감자깡, 고구마깡 등이 있고 이 제품도 다르지 않으니 옥수수깡이 좋겠다"라고 했다. 옥수수깡은 2020년 10월 출시됐고 품절 대란을 일으킬 만큼 화제가 됐었다. 

신춘호 회장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맛을 라면과 스낵으로 만들어냈다. 신 회장의 라면은 배고픔을 덜어주는 음식에서 개인 기호가 반영된 간편식으로 진화했다. 농심은 끊임없는 도전의 역사로 한국을 넘어 전세계 시장에서 활약을 이어가는 중이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같다. 

배가 고파 고통받던 시절, 내가 하는 라면사업이 국가적인 과제 해결에 미력이나마 보탰다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산업화 과정의 대열에서 우리 농심도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제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있다. 

우리의 농심가족들이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 쌓아온 소중한 경험과 힘을,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순수하고 정직한 농부의 마음으로, 식품에 대한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계로 나아가자" -故 신춘호 회장 저서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 발췌

신 회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30일 오전 5시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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