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과 국립발레단의 만남은 올해로 벌써 3번째다. 지난 1992년 ‘레퀴엠’과 ‘브라보 휘가로’를 시작으로 2007년에는 ‘뮤자게트’, 그리고 올해 ‘차이코프스키’가 공연된다. 이런 만남은 세계적으로 비추어 볼 때 우리 한국발레의 수준이 얼마 만큼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실제로 보리스 에이프만은 국립발레단원들의 연습을 지켜본 뒤 “한국 무용수가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여성 무용수상(김주원)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 정상급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김현웅 등 한국 무용수들의 춤은 몸이 아닌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듯 따뜻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고 전했다.
▶보리스 에이프만
보리스 에이프만은 최근 몇 십 년을 통틀어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몇 안 되는 러시아 안무가 중 한 사람이다. 40개가 넘는 발레 작품을 만들어낸 그는 현대 무용에 일생을 건 공로가 인정되어 작품 ‘차이코프스키’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러시아의 명예스러운 황금마스크상을 수상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단이 주는 ‘황금소피트상Golden Soffitto’을 5번이나 받았다. 또한 ‘트라이엄프상Triumph’, 프랑스 정부의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러시아 정부로부터 ‘러시아 인민 예술가’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이외에도 수많은 상을 받은 최고의 안무가다.
보리스 에이프만의 예술 철학은 고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다. 그는 차이코프스키나 스페시브체바, 몰리에르와 같은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신비성과 천재성에 매료되어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에이프만은 ‘백치들’ ‘살인자들’ ‘돈키호테’ ‘붉은 지젤’ ‘러시안 햄릿’과 같은 정신분석학의 고전적인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서 인간의 어두운 심연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작중인물들의 광기가 단순히 정신 이상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상에 도달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존재의 극단적인 상태를 통해 표현하려 했다.
▶ 1992년 발레 ‘레퀴엠’
보리스 에이프만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면, 영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불안과 우려는 없어지고 신의 계시를 느낀다. 어디에서 내가 왔나? 무엇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나왔나? 나는 어떻게 살며 또 어떻게 죽는가?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서 가장 힘들었던 날과 가장 행복했던 날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공연 중에서 관객들은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감상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의 영원하고도 창조적인 과정은 발전 메커니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술 활동은 모짜르트의 진실한 감정이었으며 그의 운명이었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장송곡이라기보다는 끝없는 아픔이고 희망이고 인간의 애정이었다.』
보리스 에이프만의 ‘레퀴엠’은 모리스 베자르의 안무작들이 흔히 갖는 매우 감각화된 제의성이 범주를 넘어 러시아인민만이 가질 수 있는 ‘대지와 영혼 사이의 어떤 신비한 중얼거림’과 갖는 풍경을 연출해냈다. 춤이 갖는 삶과 밀착된 종교성이나 그 스케일은 모리스 베자르의 예술을 초월하고 있었고, 일견 더 남성적이기도 했다. (발췌_김태원 무용평론가)
▶ 2007년 발레 ‘뮤자게트’
보리스 에이프만 - 『이 작품은 개인의 삶의 드라마를 창조적 명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예술가의 뮤즈’는 자전적인 발레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안무가의 개성이 녹아 있다. 그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창조의 지휘아래에 놓여진 연습실에서 자신의 삶을 보낸다. 그러나 창조적 영감 없이는 불가능하며, 영감은 감정 없이 불가능하다. 뮤즈와의 만남은 위에서부터 내려진 만남이다. 그것은 안무가에게 강력한 충격을 안겨주면서 창조자의 사명을 실현시키도록 만든다. 』
‘뮤자게트’는 그리스 신화 속의 춤과 노래, 시, 연극 등 여러 가지의 예술을 주재하는 여신을 뜻한다. 이 작품은 조지 발란신의 10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보리스 에이프만이 뉴욕시티발레단에 헌정한 작품이다. 발란신에 대한 안무가의 존경과 러시아 발레의 발전을 이끈 업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정교한 2인무에서 군무까지 다양한 설정과 흑백으로 구성된 의상에 대비되는 드라마틱한 조명을 통해 조지 발란신의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해석하고 그의 일생에 찬사를 보낸다.
▶ 2009년 발레 ‘차이코프스키’
보리스 에이프만 -『위대한 예술가의 창작과정은 항상 미스터리다. 그것은 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이해하기 어렵다. 일상생활과 창의성 사이의 어디에 경계선이 있단 말인가? 예술가의 인생의 이런 양 면은 즐거움과 고통, 승리와 패배가 섞여 있으며 사고의 신격화가 격렬한 열정에 자리를 내주는 상호 연결된 용기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창의적인 사람의 인생이다: 그들은 열광하는 찬양자와 악의적인 비평가 그리고 그들을 숭배하는 자들과 그들을 파괴시키려는 자들에 항상 둘러싸여 있다.
그는 사회와 직면한다. 이런 형세, 비방 그리고 몰이해의 바다에 직면하여 서 있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인생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의 음악은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한 고백이다.』
발레 ‘차이코프스키’는 음악가 차이코프스키가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공상과 현실의 혼돈 속에 휘청 이는 청년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그린다. 보리스 에이프만의 완성도 있는 연출을 통해 예술가 ‘차이코프스키’의 고뇌와 창작의 고통, 작품에 투영되었던 아름다운 상상들을 ‘발레’라는 상징성 강한 장르를 통해 그려낸다. 이번 공연은 예술가 ‘차이코프스키’의 내면에 대한 설명이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본능적인 오감으로 느끼도록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오는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뉴스테이지=박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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