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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과 전문직 드라마에서 멜로는 잘만 활용하면 효과가 적지 않다. 반면 현대 정통 멜로는 거의 실패했다.
사극 ‘이산’의 멜로는 은근하지만 대단한 힘을 지닌다. ‘이산’은 정치싸움이 드라마의 주축이지만 멜로도 빼놓을 수 없는 감상 포인트다. 정조(이서진)와 송연(한지민)은 눈빛만으로, 기껏해야 손만 잡아도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현대극에서 키스신과 베드신을 보여준 이상의 효력을 발휘한다.
‘이산’ 멜로의 고리는 사실상 이중 삼각관계다. 정조-송연-대수(이종수)와 정조-송연-효의왕후(박은혜)다. 대수도 엄연히 송연을 일편단심 사랑한다. 효의왕후는 남편인 정조가 송연을 사사로이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채 한다. 현대물이라면 ‘부부클리닉’에나 나올 만한 단순 불륜사건이지만 사극이라는 장치를 빌려오면 문제될 게 없다.
결국 삼각관계 속 이산과 송연의 사랑은 합당한 지위를 획득해 품위있는 멜로가 된다. 이들의 은근함과 애틋함은 격렬함과 쿨함을 누르는 듯하다. ‘비천무’ ‘태왕사신기’ ‘주몽’ ‘해신’ 등의 사극에서도 멜로는 은근히 빛을 발했다.
병원 드라마인 MBC ‘뉴하트’도 흉부외과에서 벌어지는 치료와 이를 둘러싼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은성(지성)과 혜석(김민정)의 멜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혜석이 ‘텔미’ 춤을 선보이고, 은성이 빅뱅의 ‘거짓말’에 맞춰 춤을 추는 등 간혹 의학드라마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수준까지 가도 시청자의 거부감은 그리 크지 않다.
발작하는 환자가 혜석을 향해 던지는 큰 물건을 막아내다 팔을 크게 다쳐 외과의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기로에 놓여있는 은성의 얘기도 둘의 멜로를 강화하기 위한 작위적(?) 설정의 혐의가 드러난다.
선악이 너무나 분명한 최강국(조재현), 병원장(정동환), 민영규(정호근) 등 의사 캐릭터가 기대만큼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은성-혜석 멜로의 활용도는 더욱 높아진 것이다. ‘외과의사 봉달희’ ‘히트’ 등 이전 전문직 드라마에서 멜로의 분량을 늘려도 시청자의 반응은 좋았다.
하지만 ‘겨울새’ ‘불한당’ ‘못된사랑’ 등 정통 멜로물은 부진을 면치 못한다. 최근 현대 멜로로 성공한 예는 ‘커피프린스1호점’ 정도다.
멜로드라마는 큰 자본 없이 비교적 손쉽게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한국만의 노하우가 가미돼 ‘웰메이드 멜로물’이 나왔고 한류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멜로드라마로의 쏠림현상으로 이어져 정통 멜로에서 드러난 전형성과 식상함이 시청자의 외면을 받게 했다.
‘못된 사랑’의 권계홍 PD는 “정통 멜로인 ‘못된 사랑’이 어필하지 못한 것은 시대가 바뀐 것일 수도 있고, 멜로로의 쏠림현상이 정상으로 돌아간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대 멜로라는 장르가 수명이 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멜로드라마를 표현하기 위해 현대물이 가장 많이 사용해 왔던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 불의의 사고 등이 어느새 상투적인 장치가 돼버려 더이상 유통기한을 늘리기가 힘들어진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사극에서 멜로가 어울리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될까. 역사 속에는 사랑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온갖 장애물이 존재한다는 게 그 토양이 된다.
“서로 다른 계급이나 신분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 개인의 운명을 뒤바꾸는 전쟁 등 역사 속 격변의 소용돌이는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을 위한 절대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한다”는 해석(미디어평론가 신주진)이 이를 뒷받침한다.
로열패밀리인 이산과 신분이 낮은 도화원 다모 송연의 사랑은 설정만으로도 매력적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정통 멜로도 이색적인 설정으로 새로운 시각과 소재를 가미한다면 그 시효를 늘릴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서병기 대중문화전문기자(wp@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