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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만 칼럼> 할머니 화장 해주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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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만 칼럼> 할머니 화장 해주는 할아버지
"빨리 나으면 영감 빨래- 설거지부터 하고 싶어..."
  • 박재만 객원논설위원 www.csnews.co.kr
  • 승인 2006.11.13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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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다. 한의사 몇 년 하면 진료에 관성이 붙을 거라고. 의사가 관성이 붙는다... 의사의 치료행위라는 게 아무리 많아야 거기서 거기다. 지금 내가 구사하는 치료행위는 침과 약, 뜸과 부항 이게 다다.

    의사가 관성이 붙는다는 건 치료행위에 몰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사가 만나는 사람은 누구 하나 같은 사람이 없다. 같지 않은 수많은 사람에게 관성이 붙을 여지는 전혀 없다. 배가 아파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고 여러 가지 정황과 체질이 있을 거다.

    사람을 보고 있으려면 늘 새로운 시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한의학의 장점이기도 하고 또 병이 아닌, 단 한번도 동일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업을 가진 의사로서 늘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건 날로 나를 새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 마음이 늘 일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편벽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인지상정인가 보다. 내가 치료하는 환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오늘은 어떤 몸 마음으로 올까 관심이 가고 침 하나 놓을 때 온 몸과 마음이 온통 집중되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로서 어떤 특정인에게 사견을 가지지 않고 모든 이에게 평정심을 유지하기엔 아직은 먼가 보다.

    얼마전 할아버지 부축을 받으며 힘든 걸음걸이로 진료실에 들어온 할머니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양 무릎에 수술자국이 큼지막하게 있었고 걸음걸이도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왼팔에 힘이 안 들어가고 물건을 쥘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말이 어눌해지고 머리가 어지럽고 입에 침이 흘러나오면서 입술 마비감이 생겼다고 한다.

    중풍 중에 편고증에 해당된다고 보여진다. 혈기가 허해서 사기(나쁜 기운)가 분육과 주리(근육과 피부)에 들어와 한쪽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병이다. 통증은 있으나 말하는 것과 정신에는 이상이 없다.

    여자는 왼쪽으로 중풍이 온다더니 딱 들어맞는 말이다. 동의보감 중풍 관련 부분을 공부하던 차에 그 할머니가 찾아온 거다. 환자가 의사 냄새를 맡는다더니...

    이런 저런 문진을 하다 보니 전형적으로 중풍이 찾아들기 쉬운 몸과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 풍은 열로 생긴다고 했다. 평소 어찌나 다혈질이었는지 화내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할아버지가 그러신다.

    얼굴은 흰 편인데 붉은 홍조가 있고 과체중에다 당뇨, 고혈압이 있다. 젊어서 변비가 심했다고 하며 몇 년 전에 치질 수술한 후로는 좀 덜해졌다고 한다. 쓰러진 적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씀드리고 앞으로 위급한 상황이 생기지 않게 관리를 잘 하시라고 했다.

    우선 마음의 평정을 가지도록 본인도 노력하고 주위 사람들이 배려를 할 필요가 있으며 음식도 짜고 매운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다.

    요참에 김치도 백김치만 먹고 집에서 고춧가루, 소금을 아예 치우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침도 매일 나와서 맞고 중풍 예방하는 약도 꾸준히 드시라고 했다. 이런 저런 진단을 하고 앞으로의 치료에 대해 말씀드리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할머니,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나아지면 맛난 음식도 드시고 좋은 구경도 많이 하셔야죠?”

    할머니가 나이 들어 몸이 성하지 못해 서러우셨는지 우시며 하는 말씀이, “선생님, 저 꼭 낫게 해주세요.”

    “할머니, 나으면 뭘 제일 하고 싶으세요?”

    그랬더니 할머니 말씀이, “나 빨래랑 설거지를 하고 싶어요.”

    그러시는 거다. 아니 평생 하느라 지겨울 법도 한 빨래와 설거지를 제일 하고 싶다니...

    평생 하던 걸 못하니까 그게 제일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할머니에게 빨래와 설거지는 지겨움의 대상이 아니라 당신이 평생 해왔고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너무나 당연한 하루 일과였던 건데 지금 그걸 못하는 게 서러운 거다.

    할머니는 꼭 할아버지가 부축해서 병원에 나오신다. 할머니가 다리 힘이 없어 침을 맞고 나면 할아버지가 다리가 넘어가지 않게 붙잡아 주고 안으로 파고드는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를 벌려주는 일도 할아버지 몫이다.

    또 할머니 화장은 늘 할아버지가 아침마다 해주신다고 한다. 밥도 할아버지가 차려 주고 설거지도 할아버지가 하고 빨래도 할아버지가 하신다고 한다.

    치료를 받던 중 하루는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백김치랑 열무김치를 담갔는데 김치통을 어떤 걸 쓸까로 두 분이 실랑이를 하다 예전과 달리 할머니가 참으셨다고 한다.

    할머니 몸은 아프지만 두 분을 보면 참 부부 금슬이 좋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다혈질 할머니와 고분고분하신 할아버지.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의사로서 나의 치료는 할머니가 빨래하고 설거지하게 하는 거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위해 빨래하고 설거지하게 하고 싶다.

    녹색한방병원 02-490-2311 / 한의사 박재만 (pjaeman@hotmail.com)

    < 박재만 한의사 약력>

ㆍ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ㆍ현 녹색한방병원 침구과장
ㆍ체형사상학회 회원
ㆍ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 연대사업국장
ㆍ민중과함께하는 한의계 진료모임 길벗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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