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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故 유일한 박사 영면 52주기…"신의·성실에 기초한 참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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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故 유일한 박사 영면 52주기…"신의·성실에 기초한 참 기업인"
  • 김경애 기자 seok@csnews.co.kr
  • 승인 2023.03.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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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11일, 한국 기업사에 모범을 남긴 유일한 박사가 영면했다. 향년 75세 나이였다.

유한양행과 유한재단, 유한학원은 10일 오전 경기도 부천시 유한대학에 위치한 유일한 기념홀(윌로우 하우스)에서 고(故) 유일한 박사 제 52주기 추모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은 유족과 조욱제 사장을 비롯해 유한양행 임직원, 유한재단·유한학원·유한 가족사 임직원과 재학생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추모식에 앞서 유한양행 임직원은 유일한 박사 묘소인 유한동산에서 묵념과 헌화를 하며 고인을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유한양행 조욱제 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유일한 박사님의 일생은 그 모든 것이 신의와 성실에 기초한 진취적인 기업가요, 선구적인 교육가요, 헌신적인 사회운동가, 애국애족의 독립운동가셨음을 되새기게 한다"고 말했다.

조 사장은 고인의 유덕을 추모한 후 "유한양행은 핵심가치인 프로그레스와 인테그리티를 바탕으로 찬란한 100년사 창조와 비전 달성을 위해 정진하겠다. 유한재단은 어두운 곳에서 힘들어 하는 우리 이웃을 위해 보다 큰 배려와 관심을 기울여 나가겠다. 유한학원도 젊은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더욱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유한양행과 유한재단·유한학원은 매년 유일한 박사의 기일에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이를 통해 창업 당시부터 계승해 온 유일한 박사의 애국애족 정신과 숭고한 기업 이념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유일한 박사 묘소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조욱제 사장(가운데)
▲유일한 박사 묘소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조욱제 사장(가운데)

1971년 3월 11일 작고할 때까지 일찍부터 기업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공익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하는 등 기업 경영으로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 고 유일한 박사는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참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난 유일한 박사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으나 이를 뒤로하고 1926년 31세가 되던 해에 귀국한 후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국민 건강 향상을 위한 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 박사는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일념으로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1939년에는 종업원지주제를 우리나라 최초로 채택했다. 1962년 국내에서 두 번째로 주식공개를 단행했으며 1969년에 경영권 상속을 포기하고 전문 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줬다.

유한양행은 1969년 이후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사원 출신의 전문경영인을 선출하고 있다. 현재 유한양행 임직원 중 유일한 박사의 친인척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故 유 박사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기업 이윤을 나라 발전을 위한 인재 양성에 투자했으며 장학과 교육사업도 활발히 전개했다.

영면 후 공개된 유언장은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장남 유일선 씨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과 함께 유일선 씨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 양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만 남겼다.

딸 유재라 씨에게는 학생들이 뛰놀 수 있도록 유한중·공업고등학교 일대의 땅 5000평 등을 상속했는데 이 역시 '유한동산'으로 조성해 청년 학생들의 뛰어놀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제외하고는 "소유 주식을 비롯한 모든 재산들은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쓰도록 한다"는 유언을 남겨 전 재산 사회환원이라는 뜻을 완성했다.

작고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공개된 CIA의 비밀문서도 관심사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서 지속 활동한 행적이 알려지며 눈길을 끌었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 중 정점은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임한 냅코(NAPKO) 작전이다.

故 유일한 박사는 1942년부터 미육군전략처(OSS)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OSS의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작전에 공작원으로 입대하게 된다. 작전은 한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독수리 작전과 합동 수행으로 한국인을 국내에 침투시켜 정보 수집, 폭파, 무장 유격활동 등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한편 딸 유재라 씨는 1991년 세상을 떠나면서 본인이 갖고 있던 주식 등 200억 원대의 재산 모두를 사회에 기부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대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비자가만드는신문=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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