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게릴라 극장에 둥지를 틀었던 연극 ‘그류?그류!’가 대중들의 사랑 속에 지난 5월 31일 막을 내렸다. ‘진실이란?’ 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다뤘던 원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 본질에 대한 의문을 주제 키워드로 삼았다. 대추리라는 마을에 이사 온 한 가족의 사연과 그 모순된 사연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마을 사람들의 대립이 관극 주요 포인트다. 극이 후반부로 흘러갈수록 내면 깊숙한 데 감춰진 인간의 천박한 호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이 마을 사람들의 과장되고 점층적인 연기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다소 무거운 주제에 관객들이 힘겹지 않도록 공연은 시종일관 유쾌함과 경쾌함으로 다가간다.
- 극사실주의적 무대배경과 과장된 배우 연기, 부조화 속 ‘조화’
‘미연상회’라는 간판을 단 가게 앞마당엔 평상 하나와 책상 그리고 우물이 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넝쿨 식물이 진짠지 조환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상 위의 감자는 연기 도중 극중 배우가 실제 껍질을 벗겨 한 입에 다 먹기도 한다. 배우들이 드나드는 길목 앞 우물에서는 진짜 물이 솟고 배우는 그걸 마시기도 하고 바닥에 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몸에 끼얹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기에 활용한다. 실제로 장사를 해도 될 것 같은 ‘미연 상회’는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세세한 부분의 소품까지 신경을 썼다.
이러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연출의 특성 상 갈수록 감정을 끌어올려야 하는 배우들의 입장에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쓴 무대가 하나하나가 연기의 조미료 역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 관객들의 시선을 붙드는 점층적 서사 구조
관객들은 궁금해한다. 장모가 미쳤는지 사위가 미쳤는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끝가지 읽는 이유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느냐 하는 것 때문이다. 장모와 사위의 번복되는 사건의 설명은 배우 뿐만 아니라 관객 역시 긴장하게 만든다. 대추리 마을 사람들이 얘기하는 ‘진실’에 도달하기까지 한 줄기로 이어지는 서사구조는 관객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다. 관객들은 공연을 보는 내내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그들이 말하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극에 집중한다. 한 순간도 관객이 가진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 “그건 폭력이에요. 당연한 인간의 권리를 짓밟는 폭력!”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끼는 ‘배려’는 더 이상 ‘배려’가 될 수 없다. 세 가족이 대추리 마을 주민들의 ‘관심’ 때문에 오히려 상처를 받는다면 그 호기심은 단순한 ‘관심’이 아닌 ‘폭력’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연극은 단호하게 ‘폭력’이라고 말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악한 본성을 감추고 살아간다.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자기 자신 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비춰지기를 바란다. 끊임없는 노력이 보태진다. 그러나 자칫 방심하는 순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악한 본성은 고개를 쳐든다. 선을 가장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고 다른 사람들을 훔쳐보기 좋아한다. 세 가족의 비극도 대추리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춰진 악한 본성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동정과 눈물로 포장을 그럴 듯하게 했을 뿐. 장모나 사위의 증언을 듣고 즉자적인 감정에 반응해 그들을 동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욕망, 저급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제 3자가 개입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세 가족이 대추리 마을 주민들을 만나기 전까지, 세 가족은 나름의 규칙과 질서 속에서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들은 잘못됐으니 내가 고쳐줄게’하는 식의 3자(대추리 마을 주민) 개입은 오히려 그들의 규칙을 깨트리는 일이 되고 불행을 초래하는 일이 되었다. 물론 대추리 마을 주민들은 세 가족의 상처와 오해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다. 그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실 관계에만 광적으로 집착할 뿐이다. 세상에 물리적인 폭력만이 폭력의 전부는 아니다.
[뉴스테이지=최나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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