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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프랑스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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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프랑스 정원’
봉주르 샹젤리제
  • 뉴스관리자 csnews@csnews.co.kr
  • 승인 2010.02.19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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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젤리제에는, 샹젤리제에는/ 태양이 빛나건 비가 오건 간에/ 낮이 되었건 밤이 되었건 간에/ 샹젤리제에는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지”


‘오! 샹젤리제’의 샹송을 배경으로 등장한 한 남자. 빨간 장미꽃을 가슴에 단 사내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손에 기타를 들고서 살아가는 미친 이”처럼 삶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노래는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서 흘러나오던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만큼이나 역설적이고도 참혹하다. 몸의 권리를 함부로 유린당하고, 반복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감내해내고,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다른 여자를 맞닥뜨려야 하는 이 여인들은 두부를 자르듯 칼로 사내를 찌르고 만취한 사내를 남겨놓은 채 집에 불을 지르고는 삽을 들고 자신이 묻히게 될 무덤을 담담히 판다.


헌데 그녀들의 가해자는 가족이라 불리는 그들의 피붙이들이었다. 그녀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영화 속 가상 세계가 아닌 냉혹한 현실의 세계에서 주조됐으며, 부조리한 현실은 그녀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이끈다. 하지만 그녀들은 교도소장의 목을 조르고 임신한 것처럼 배를 꽁꽁 싸맨 채 이 파렴치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자기가 가장 아끼던 팬티를 건네주고, 윌리엄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를 읽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는”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를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목욕 용품의 명절 선물 세트에, 구더기가 들 끊는 부패된 고깃덩어리에 그들의 꿈은 또다시 유린당한다. 한 남자의 사랑을 함께 나눠야 하는 두 여간수는 자매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수감자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설파한다. 장미꽃의 사내는 여성스러운 머리 스타일을 하고는 감미로운 멜로디를 들려주지만 그 멜로디에는 교도소장이라는, 그리고 남성이라는 직위와 성별에서 파생되는 규정과 폭력이 잠재돼있다. 그는 보헤미안처럼 살며 괴팍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하지만, 그의 두 딸들에게 자신만의 룰을 적용시키며 그녀들을 여간수로 만든다. 그녀들은 아버지가 하달한 교묘한 수감 철칙들을 기계처럼 수감자들에게 주입시키며 자신을 비롯한 모두의 꿈을 규격화시킨다.


그녀들은 누추한 감방 깊숙이 꿈을 접어둔 채 안온한 일상을 꾸려간다. 꿈속에서 프랑스의 정원을, 샹젤리제 거리를 돌아다닐지언정 현실에서는 묵묵히 땅을 파고 성경을 읽고 수면제를 먹으며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한다. 해진 죄수복은 남루하지만 몸의 일부분처럼 편안해지고, 프랑스 정원에의 꿈은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희미해진 꿈의 한 자락을 움켜쥔 손을 쉽사리 놓지 못한다. 신기루처럼 한순간 사라져버릴 꿈일지라도 그녀들은 포스터 속의 여인처럼 눈을 감은 채 흙을 퍼 올리며 잡히지 않을 꿈을 언제까지고 길어 올린다.


 (뉴스테이지=박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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