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키, 리바이스, 디젤 등 세계 유명 브랜드들은 이미 ‘그들’의 패션 감각에 백기투항한 지 오래다. 한때 콧대 높던 브랜드들은 최신 트렌드를 읽기 위해 이제 ‘그들’을 찾는다. 세계 패션시장을 주름잡는 일본의 거리패션(스트리트 패션ㆍStreet Fashion), 일명 ‘니뽄(Nippon) 스타일’이 궁금하다.
우리나라를 거쳐 최근 중국에 불고 있는 패션계 ‘짝퉁 열풍’의 원조는 사실 일본이었다. 30여년 전 일본에선 명품이거나 명품을 그대로 재현해낸 짝퉁 또는 명품과 비슷한 느낌의 제품들만이 속된 말로 ‘장사가 됐다’.
그러나 일본 패션시장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다른 분야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실천했고, 그 실천은 패션계에서마저도 일본을 강대국 대열에 들어서게 만들었다.
조규화 이화여대 의류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최근 들어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세계 유명 브랜드와 협업하는 사실이 알려지고 화제가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은 일본의 패션시장이 요즘 새롭게 부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며 “일본 패션시장은 과거 80년대부터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 계속 성장해 왔고, 요지 야마모토, 다카다 겐조 등 많은 1세대 디자이너들이 그 성과를 입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브랜드 겐조(Kenzo)로 잘 알려진 다카다 겐조는 일찍이 지난 1980년대부터 일본의 거리 패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선보였고, 브랜드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도 패션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는 프랑스 유학 시절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중고 의상들을 토대로 완전히 새로운 옷을 만들어 일본의 거리패션을 널리 알렸고, 현재 ‘네오 쿠튀르(Neo-coutureㆍ새로운 모드의 창조자)’ 중에서도 단연 신화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다.
요지 야마모토도 그때부터 일본 스트리트 패션의 우수성을 입증해온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일본의 독립 디자이너이자 스타일리스트인 한정미 씨는 “요지 야마모토는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 일본의 젊은이들이 즐겨 입던 일명 ‘넝마주의 패션’을 그대로 구현해 내놓았고, 당시 보수적이고 화려한 의상들만 고집하던 패션계로부터 ‘파격적’이라는 찬사를 들으면서 유명해졌다”며 “마찬가지로 일본의 스트리트 패션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언더커버나 꼼 데 가르송, 이세이 미야키 등의 유명 브랜드들도 앞서 언급한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는데, 요즘 유행하는 레이어드룩이나 빈티지 패션 등은 다 이들 브랜드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전형적인 ‘니뽄’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공작새마냥 화려한 색채의 머리 스타일, 벌써 10년 가까이 유행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는 속칭 구제(舊製)패션과 레이어드룩, 모델 케이트 모스와 브랜드 디올 옴므 덕택에 일약 스타덤에 오른 스키니 진 등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 세계 패션계는 그 독특한 스타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이것들이 20세기 패션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 화두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스타일로 자리잡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일본 젊은이들은 애초부터 이 아이템들에 놀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 스타일들을 길게는 수십년 짧게는 10여년 전부터 일본 거리에서 늘 보아 왔기 때문이다.
조윤희 삼성패션연구소 연구원은 이에 대해 “세계적 톱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일본의 ‘스트리트 패션’은 도쿄(東京)의 하라주쿠, 시부야, 다이칸야마 등 유명 패션가의 세련된 거리패션을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나 잡지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는 패션업계의 오랜 관행이던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의 무조건적인 전파’가 아니라, 하류문화 역습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최근 세계 패션계에 일어난 일대 혁신이라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일본 패션시장의 놀랄 만한 발전은 명품시장과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지난 2003년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인 마크 제이콥스는 일본의 유명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와 손잡고 루이비통의 고루한 이미지에 대대적인 변화를 줬다.
색색의 모노그램으로 치장한 ‘아이러브 모노그램’ 라인, 귀여운 체리가 박힌 ‘체리백(Bag)’, 일본의 이미지를 잘 느낄 수 있는 벚꽃이나 몽환적인 파스텔 색상 등이 사용된 제품 등은 모두 일본의 패션 감각이 바탕이 된 무라카미의 작품이었다.
물론, 루이비통은 이미 스테판 스프라우스라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와 함께 루이비통 그래피티 라인을 선보이는 등 지난 1997년부터 많은 변화를 시도해 왔지만, 무라카미와 루이비통이 함께 일구어낸 폭발적인 반응과 인기는 전례없던 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단순화된 원숭이 이미지로 잘 알려진 일본의 ‘베이딩 에이프(Bathing Apeㆍ이하 베이프)’는 평범한 일본의 거리패션으로 시작, 몇 년 사이 고가의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잡아 업계의 이목을 끈 브랜드 중 하나다.
리바이스(컬러 스티치), 나이키(에어 조던 라인의 색상과 디자인), 카시오(디자인) 등과의 협업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높이는 한편, 일본의 강점 마케팅 기법인 ‘한정판(Limited Edition)’ 전략을 쓰며 값비싼 고급 힙합 브랜드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헤럴드경제 도쿄 통신원으로 활동했던 유우영 씨는 “힙합계의 거물 패럴 윌리엄스가 베이프의 후드 티셔츠와 스니커즈를 착용하게 되면서 이 브랜드는 전 세계적인 붐을 일으켰다.
도쿄의 하라주쿠 거리 모퉁이에서 시작된 베이프는 현재 뉴욕, 런던, 홍콩, 대만 등 세계 각국에 매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패션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베이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은 그들이 자랑하는 애니메이션(아니메) 기술과 서양인에게 신선하게 느껴질 자국 문자 등을 활용해 또 다른 패션 스타일을 창조해 내며 다시 한 번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현재 만화 에반게리온의 레이, 카드캡터체리의 체리, 포켓몬의 피카츄 등 다양한 아니메 캐릭터들이 일본을 비롯해 곳곳의 패션계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유명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입어 화제가 됐던 일본어 문양이 들어간 티셔츠 등은 창의적인 일본 패션가의 명성에 방점을 찍었다.
일본의 좁은 골목길에서 시작한 그들만의 ‘오타쿠(일종의 마니아ㆍ관심 있는 특정대상에 지독히 심취하는 이를 일컫는 일본어) 패션’이 세계 패션계를 뒤흔드는 요즘이다. 일본이 패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에 대해선 전문가들도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인들에겐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거리패션이 전 세계 패션시장에선 큰 화두가 될 만큼 많은 일본인들이 말 그대로 ‘패션에 미쳐 있다’는 사실이다. 패션계 후발주자였던 일본이 업계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역시 후발주자인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을 안겨 준다. ‘니뽄 스타일’, 과연 그 끝은 어디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김이지 기자(eji@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