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강도진(가명ㆍ34) 씨. 그는 요즘 전직(轉職)이라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 그의 부인은 어엿한 홍보대행사 사장님. 아내 회사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강씨는 전업주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주말에 맛있는 저녁식사를 만들어주려고 요리책을 뒤진다. “아직 초보 단계죠. 근데 너무 재밌어요.” 강씨는 경제적 문제는 물론 2세 육아 계획까지 아내와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한푼이라고 살림에 보태기 위해 재테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도 강씨를 둘러싼 최근의 변화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7월 현재 육아와 가사를 이유로 통계상의 노동시장을 탈출(?)한 남자 비경제활동인구는 13만7000여명. 대부분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아내에 기대어 사는 일명 ‘셔터맨’?, 그렇지 않다. 최근의 전업 남자주부들은 앞치마를 두르는 것은 물론 재테크 전문가까지 꿈꾸는 21세기형 전업주부들이다. 그들이 꿈꾸는 행복한 가정주부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제는 당당한 남자주부 시대
지난 4월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www.saramin.co.kr)이 직장인 109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남성의 33.1%가 “배우자의 수입이 많으면 집에서 살림만 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SBS 드라마 ‘불량주부’에서 주인공 손창민의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가정에서 가사, 육아에 대한 남성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엄마=집에 있는 사람, 아빠=돈 벌어오는 사람’이라는 공식은 거의 깨졌고, 이는 대중문화에도 적극 반영됐다.
영화 ‘미스터 주부 퀴즈왕’(2005)에서 한석규는 6년차 전업주부 역할을 맡았다. 한석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가사관리에 천부적인 감각을 자부하는 일명 ‘엘리트 전업주부’였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남자주부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소재로 선택됐고, 이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는 명예퇴직 후 집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던 영화 ‘해피엔드’의 최민식과는 전혀 다른 인물. 엄청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수동적으로 가정주부의 위치에 처해진 이들은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사회로 나가기를 희망했다.
자발적으로 가정주부의 꿈을 꾸는 남자들은 가정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강씨는 “별 생각이 없다가 가정주부가 된 경우 못 견디겠다는 선배들이 많았다. 아직도 남자가 회사도 안 다니고 밥짓고 살림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 간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남성의 수는 외환위기의 후폭풍 속에 있던 1999년 7월 31만4000명에 달했지만 이후 조정기를 거치면서 현재 절반 수준으로 낮아진 13만~14만명 선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솥뚜껑 운전 기본, 재테크도 필수
지난해부터 재테크에 맛을 들인 이동석(가명ㆍ33) 씨는 전업주부가 꿈이다. “요리에 취미가 있어서 살림이 재미있을 것도 같고, 시간이 자유로우니까 땅도 보러 다니고 하면서 재테크 공부를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씨는 “잘만 하면 직장 다니는 것보다 경제생활도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일명 ‘셔터맨’이라고 해도 그냥 놀고 먹는 시대는 지났다. 이씨는 최근 젊은 남자들이 배우자를 오리에 비유하는 유머를 들려줬다. 남자가 일하지 않고 여자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유지되는 의사ㆍ약사 등의 직업을 가진 여자는 황금오리, 전업주부이기는 하나 재테크에 천부적인 소질과 재능을 보유하여 땅ㆍ집ㆍ주식 등에 능한 여자는 청둥오리, 딸랑 전업주부는 바로 백성의 고혈과 등골을 빼먹고 사는 ‘탐관오리’라고 한다는 것.
이씨는 “요즘 한쪽만 벌어서는 안 되는 거니까 여자가 벌고 남자가 주부라고 해도 이제 그냥 주부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맞벌이도 힘들다는 것이 요즘 사정이다 보니 한쪽이 가정주부를 택할 경우 기대하는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쇼핑몰 같은 부업을 선호한다거나 재테크에 더욱 힘써주기를 바라는 것.
김건영(가명ㆍ36) 씨는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절대 살림이 우선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일단 아내의 수입이 월 500만~600만원 정도 돼야 하고 이를 토대로 주식하고 재테크에 올인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A광고회사 AE 조명원(가명ㆍ29) 씨는 “살림하면서 춤 등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는 여유도 가지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냥 놀지는 않고 인터넷 쇼핑몰이라도 하면서 지낼 것 같다”고 말했다.
▶쉽게 덤비다간 주부 우울증에 걸리기 십상
예비 남자주부를 꿈꾸는 이들이 늘고 있지만 아직은 농담반 진담반인 경우가 많다. 대기업에 다니는 심현석(가명ㆍ32) 씨는 “그만둬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그만둘 수도 있지만 집안살림에 딱히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나친 야근에 아이가 아빠를 낯설어하고 일도 나와 잘 맞지 않을 때 가정주부를 꿈꾼다”고 말했다. 또 재테크를 잘만 하면 보통 직장인의 월급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익을 거두는 것을 보고 “직장 때려치우고 재테크나 할까”라며 가정주부라는 본질 이전에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이들도 많다.
‘매일 아침 밥상 차리는 남자’ ‘Hello! 아빠 육아’의 저자로 9년차 전업주부로 유명한 오성근(42) 씨. 오씨는 남자주부를 지망하는 ‘후배’들이 늘어나는 것이 그래서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그는 “인식 전환은 환영할 만하지만 부인이 나보다 더 많이 버는데 그만두겠다 같은 경제적인 문제만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경고했다.
그는 “살림하고 육아를 담당한다는 것은 살림전문가, 육아전문가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주위 사람들의 편견을 이겨낼 뱃심도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씨는 남자주부에 대한 허황된 꿈을 꾸는 남자들에 대해 “실연하고 군대간다. 그런데 가면 100% 다 후회한다”고 잘라 말한다. 사회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편해 보이는 가정주부를 선택하지만 실제 가정주부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 오씨도 늘 집과 집 근처의 공간을 벗어날 수 없고, 항상 가족을 위해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가정주부의 생활을 못 견뎌 주부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제대로 살림하고 애 키우려면 집보러 다닐 시간이나 주식에 매달릴 시간이 있겠어요? 주부는 절대 만만하게 덤빌 일이 아닙니다.”
오연주ㆍ이한빛 기자(she@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