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죽하면 ‘시어머니 심술은 하늘에서 타고난다’고 단정짓고 ‘시어머니 웃음은 두고 봐야 한다’고 의심했을까. 그 고충을 견디기 힘들어 ‘새 사람 들어와서 3년 나기 어렵다’는 말이 나왔고 ‘오래 살면 시어미 죽는 날도 있다’는 저주에 가까운 속담까지 등장했다. ‘시어머니 미우면 남편도 밉다’고 해 고부간의 갈등은 가정 불화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고 ‘남녀 평등’이란 문화적 기치를 내걸고 자라온 신(新)며느리들의 등장으로 며느리의 고된 역사도 바뀌어 가고 있다. 일단 요즘 며느리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무조건 ‘네’가 아니라 아닌건 ‘아니’다. 힘들면 ‘힘들다’하고 싫으면 ‘싫다’고 당당히 의사를 밝힌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어머니의 말에 말대꾸를 하고, 행동에 제동을 건다.
바야흐로 ‘며느리 전성시대’. 집안 여성들이 고생하는 명절의 모습도 바뀌어 가고 있다. 유능하지만 집안 일은 못하고, 똑똑하지만 꾀 피우는 며느리의 반대편엔 아들 눈치보랴 속 시원히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하는 시어머니가 늘고 있다. 한편에선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앞서 배려하는 시어머니들이 변화의 선두에 섰다.
신현자(64ㆍ경남 창원)씨는 추석을 2주일 앞두고 아들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았다. 다가올 추석을 앞둔 안부 전화이겠거니 했지만 아들은 대뜸 “이번 추석엔 못 내려가겠다”는 말부터 꺼냈다. 추석 연휴에 태국으로 떠나는 여행을 이미 예약해뒀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 따지려는 신씨의 전화를 바꿔받은 며느리는 “앞으로 아이가 생기면 이렇게 여행다니기가 더 힘들 것”이라며 “특히 이번 추석은 연휴가 닷새나 되는데 그냥 어영부영 보내기엔 너무 아깝지 않느냐”고 말했다.
기독교 집안이라 어차피 차례는 지내지 않지만 그래도 추석이면 간소하게 나마 음식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명절 분위기를 냈었다.
“아버지, 어머니도 이번 추석엔 여행을 다녀오시는 게 어떠냐”고 아들이 달래는 말을 들은 신씨는 지난 설 결혼 후 첫 명절이라고 내려와 뚱하니 앉아있던 며느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씨는 “결혼한지 5년째인 첫째 며느리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아무리 차례를 지내진 않지만 미리 상의도 없이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이니,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고 한숨을 짓는다. 어린 아이들도 아니니 강요하고 억지로 데리고 내려 올수도 없는 노릇. 괜히 옆에서 거드는 아들까지 미워진다.
반면 고진희(59ㆍ경기도 안산)씨는 며느리가 순순히 찾아와도 골치가 아프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며느리가 부엌일을 통 못하기 때문이다. 일을 못해서 자꾸 안 시키다보니 이젠 아예 손을 놓았다. 그래서 아들 하나인 고씨의 일손을 덜어줄 이가 없어 명절이면 고씨만 고생이다. 설거지 등 뒷일을 같이 하지만 가장 바쁠 때인 차례상을 준비할 때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고씨는 “처음엔 이것저것 시켜보기도 했지만 워낙 일이 서툴러 오히려 일만 더 만들었다. 이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고 웃으며 얘기한다. 하지만 하려고 노력을 하거나 먼저 와서 ‘이거 할까요’하고 물을 만도 한데, 다른 가족들과 같이 앉아서 TV만 보니 명절이 지나면 나만 온 몸이 쑤신다”고 털어?愿쨈? 그렇다고 말을 하자니 껄끄러워질 것 같고, 말 안 하자니 속만 탄다. 고씨는 올해도 멀뚱히 섰는 며느리에게 아무말도 못할 것 같다.
젊은 며느리들도 할 말은 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며느리에게 명절은 스트레스다. 싫어도 해야하는 것이 시댁 일. 시부모님은 친딸처럼 대해준다지만 역시 시댁은 시댁이고 친정만큼 마음이 편할 수 없다.
결혼 2년 차인 박현경(31)씨는 “결혼 전 명절이란 직장생활에 지친 몸을 쉬고,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수다를 떠는 날이었는데 결혼과 동시에 더 강도 높은 ‘노동의 연장’이 돼 버렸다”고 하소연했다. 박씨는 “올해도 시댁에서 명절을 보낼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며 “적당히 일을 끝내고 나면 빈말이라도 ‘친정에 얼른 가보라’고 한마디 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되물었다.
지난 5월 결혼하고 첫 명절을 맞는 조민혜(28)씨 역시 “시댁에 가서 일하고 자는 것이 부담스러워 추석이 하루하루 다가올 수록 신경이 예민해진다”며 “끊임없이 ‘나 한사람만 고생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시어머니의 속앓이’와 ‘며느리의 부담’이 타협점을 찾아가고 있다.
신며느리에 대응하는 신시어머니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고 있는 것. 자연스러운 접점으로 갈등을 럽게 타협점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명절이면 주부라는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어깨에 져야했던 일거리를 줄이는 것이 먼저다.
오경미(65ㆍ경기도 이천)씨는 2~3년 전부터 명절 상차림 분위기를 확 바꿨다. 서양의 ‘BYOB(Bring your own bottle)파티’ 스타일로 각자 한 가지씩 명절 음식을 해오기로 한 것. 오씨가 명절 김치를 담그고 나물 반찬을 준비하면, 큰 며느리는 송편과 전을 준비해오고, 작은 며느리는 갈비와 과일을 준비해오는 식이다.
‘BYOB 스타일’의 상차림을 처음 제안한 것은 며느리들이 아닌 오씨였다. 오씨의 큰 며느리(36)는 홍보대행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둘째 며느리(30)는 학습지 방문교사다. 두 직장인 며느리에게 추석은 명절 이전에 오랜만에 찾아온 연휴다. 추석을 맞아 달콤한 휴식 대신 하루종일 부엌일에 메여있어야 하니 함께 있으면서도 두 며느리의 얼굴이 펴질 리 없다.
오씨는 “함께 해서 즐거워야 할 시간이 오히려 괴롭고 불편한 자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명절을 지낸 후엔 반드시 ‘부부싸움 후폭풍’이 몰려 온다는 아들의 하소연도 결정에 한 몫했다”고 말한다.
젊었을 때 자신이 직장에 다니면서 겪은 명절 스트레스의 기억을 떠올리면 며느리 심정을 아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라는 것. 명절 준비를 이런 식으로 바꾸고 나서 오 씨도 한결 편해졌다. 고부간에 감정적으로 부딪힐 경우도, 잔소리할 일도 줄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거리를 줄이는 것이 ‘모두가 즐거운 명절’을 보내는 지름길이다.
권순자(59ㆍ서울 행당동)씨는 추석 상차림은 아예 자식들 손에 맡긴다. 시어머니로부터 상차림 전권을 넘겨받은 며느리들은 상차림 업체에서 간소한 차례상을 통째로 구매한다. 권씨는 “형제도 몇 없는 집안에서 며느리가 일을 혼자 도맡아 하려면 힘에 부칠 수 밖에 없다”며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며느리만 몰아붙이면 ‘말 안 통하는 시어머니’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추세를 타고 각종 온라인쇼핑몰에서도 다 차려진 차례상을 통째로 판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픈마켓인 G마켓과 옥션, 인터파크 등에도 예매가 몰리고 있다. 4인 가족 기준 20만원 안이면 과일을 비롯해, 떡과 식혜까지 갖춰진 차례상을 마련할 수 있다. 한정 판매로 미리 예약을 받아놓고 추석 전 날인 24일 일괄 배송해주는 식이다.
옥션에서 차례상을 판매중인 ‘반찬천국’의 김지은 대표는 “조미료를 안 넣은 음식에 전국 배송이 가능해 추석을 앞두고 하루에도 수십통의 전화 문의가 온다”며 “주로 20대 후반의 젊은 주부들이 많고, 점차 3, 40대로 넓어지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고추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보다 더 맵겠냐’는 비유도 이젠 옛 말. 한 때 ‘한 집안의 며느리’라는 책임감에 짖눌렸던 시어머니들이 이젠 ‘아들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해지면서 스스로 접점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타고 흐르는 시어머니들의 변화에 매운 시집살이로 눈물 빠질 일도 줄어들고 있다.
윤정현ㆍ김소민 기자(she@heraldm.com)